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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May 15. 2024

오늘, 생각나는 사람

석가탄신일에 태어난 외할머니

5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석가탄신일'이 생신이었다.

그래서 외가 친척들은 '석가탄신일'에는 큰 외삼촌댁에 모여 할머니 생신을 축하하곤 했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전처럼 다 같이 모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외삼촌과 엄마 그리고 이모들은 모여서 밥을 한 끼 먹는다고 하니 할머니의 자녀들까지는 여전히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기린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특별한 그리움이 있지는 않다. 할머니의 기일도 9월 말이나 10월 초였던 것으로 어림잡아 기억하고 있을 뿐 정확한 날짜를 모르겠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낼 때 조금 많이 울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할머니에 대한 특별한 추억보다는 한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게 실감이 되서였다. 나에게 할머니는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나에게 그 대(代)의 어른이라고 하면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할머니를 떠 올리면 산과 절이 생각난다. 70대까지 할머니는 아가일 체크무늬가 들어간 붉은 양말을 종아리까지 올려 신고 등산을 즐겼다. 등산을 할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늘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산을 워낙 좋아했으니 절에도 자주 갔는데 나는 할머니가 '석가탄신일'에 태어난 사람이니 절에 가는 것이 꽤 운명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이모의 성화에 못 이겨 교회를 꾸준히 나간 것을 보면 할머니가 절에 다녔던 건 특별히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한 번도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처럼 할머니에게 폭 안기지 못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여러 가지 눈치를 좀 봤는데 거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외가에 갈 때면 취해있을 때가 많았다. 명절에는 새벽부터 한남동에 있는 큰아버지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오후에는 명절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는 인천의 작은 큰아버지 댁에 따로 들렀다가 당산동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갔다.

외가 친척들은 모두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였고 우리는 밤손님처럼 깜깜해서야 도착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침 차례 상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인천 작은 큰아버지댁에서 이어 마신 술이 여전히 깨지 않은 채였다. 늘 그랬다. 그런 아버지와 함께 들어가는 할머니 집은 늘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쓸데없이 당당했다. 늦게 온 주제에 기껏 잘 차린 밥상을 놔두고 할머니에게 해장용 잔치국수를 해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할머니는 못 이긴 척 주방으로 가 소면을 삶았고 아버지는 기어코 국수 한 그릇을 할머니에게서 받아냈다. 국수가 늘 많이 삶겼기 때문에 내 몫도 있었는데 식탁 위에 잘 차려진 갈비찜, 생선구이를 먼저 먼고 싶었지만 국수를 먼저 먹었다. 나 역시 국수를 먹고 싶었던 사람처럼.

동생은 그러든 말든 입에 양념을 묻혀가며 갈비찜을 손으로 뜯어먹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얄밉고 부화가 치밀어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역시 나름의 이유는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변변치 못한 살림을 꾸리고 있을 때라 처가에 오래 있는 것이 불편했을 수도 있고 워낙 어릴 때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가끔은 이유 없는 생떼를 부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수록 술도 마시지 말고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 이유를 찾아 덕지덕지 잘 붙여 놓아야 한다. 그게 아버지를 그만 미워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말년의 할머니는 유머가 넘쳤다. 가끔 '내가 빨리 죽어야 다들 편하지'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식구들하고 대화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불쑥 뛰어들어 농담을 던지곤 해 모두를 웃게 했다. 아내 역시 할머니를 재치가 넘쳤던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할머니의 유머는 누구나에게 먹혔던 것이다.

아내를 처음 할머니에게 인사시켰을 때, 할머니는 아내의 두 손을 꼭 붙들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내 손을 저렇게 잡아 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마흔이 가까워질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는 손자를 보며 할머니 역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할머니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병원에서 고통스럽게 누워 있었다. 5초에 한 번씩 기침을 했고 보는 사람들 역시 고통스러웠다. 눈에 초점은 분명했지만 기침을 할 때마다 초점이 흔들렸다. 빼짝 마른 몸에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폐가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 간병을 했던 엄마는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시니깐 편안하시게 그만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딱 한번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런 생각을 잠시라도 한 자신을 책망했다.

아주 가끔씩 할머니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생각을 한 것이 두고두고 죄송하다고 얘기한다. 어쩌면 오늘도 어느 순간에 엄마의 엄마에게 '그때 죄송했다'라고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엄마를 보다보면 할머니의 모습이 보여 놀랄 때가 있다. 하긴 큰 이모에게서는 이미 느꼈고 요즘은 막내 이모에게서도 그 모습을 발견한다. 다들 할머니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할머니 생신이 '석가탄신일'인 건 괜찮은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날이 되면 짧게라도 한번 정도는 할머니를 생각할 것이고 가끔은 할머니와의 추억을 꺼내서 펼쳐볼 게 될 것이다.


마치 오늘처럼....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잔치국수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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