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임자는 따로 있어요.
이틀 전, 평소보다 손님이 일찍 끊겨 주방 청소를 조금 일찍 하려던 참이었다. 냉장고를 뒤져 재료를 재 정리하다가 투명봉투에 빵빵하게 채워진 달래를 발견했다.
엄마가 직접 캐다 준 달래.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달래. 4인 가족이 되길 바랐어서 그런가 엄마는 매번 4인 가족 몫의 재료를 가져다준다.
아내와 단 둘이 사는 나는 엄마가 가져다주는 재료가 고마우면서도 부담된다. 버릴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 대부분이 쉽게 시들거나 상하는 재료들이라 일주일의 식단 대부분을 그것들로 채운다.
봉투에서 달래를 꺼내 보니 뭉쳐져 있던 솜처럼 스스로 부풀었다. 다 씻어 말리고 있는 도마를 다시 꺼내 냉이를 잘랐다. 조금은 된장찌개에 넣고 나머지는 달래 간장을 만들어 두려던 참이었다.
야채만 넣은 깔끔한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호박, 양파, 표고, 두부 그리고 달래를 듬뿍 넣고 바글바글 끓였다. 내일 점심이나 저녁 즈음에 아내는 된장찌개로 한 끼를 해결할 것이다.
이번 주부터 아내는 가게에 나오지 않고 있다. 손님이 없어 둘이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됐다. 집에서 아내가 그동안 하던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가게를 하다 보니 집 냉장고엔 음식 재료들이 충분하지 않다. 웬만한 음식은 가게에서 해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 있으면 대충 빵을 먹거나 라면으로 때우게 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가게에서 음식을 만들어 집으로 배달하고 있다. 재료를 넉넉히 넣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넉넉하게 만들어졌다. 국이나 찌개는 늘 그렇게 2인분 정도 넘치게 끓이게 된다. 집으로 담아 갈 마땅한 그릇을 찾고 있는데 간판 불이 이미 꺼진 매장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헬로.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어 리틀 빗
짧고 옅은 갈색의 머리가 먼저 눈에 띄는 외국인이었다.
-아임 베지테리언. 벗 에그, 두부 이즈 오케이!
외국인은 영업을 하는 시간인지 먼저 묻지도 않고 자신이 채식주의자고 어떤 음식까지 먹을 수 있는지를 밝혔다. 비건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사이트 <해피카우>에 식당을 방문했던 채식주의자들의 리뷰가 괜찮은지 종종 그렇게 채식을 하는 손님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오픈 초창기에 비건들을 위해 채식잡채를 판매한 적이 있다. 그게 반응이 괜찮았다. 지금은 메뉴에서 내렸지만 바쁘지 않은 시간에 온다면 귀찮아도 기꺼이 만들어 주는 편이다. 얼굴만 봐도 '나 지금 너무 배가 고파요.'라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집밥은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고 해도 무방한 한국이지만 막상 사 먹으려면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게 별로 없다. 야채로 만든 김밥이나 샐러드가 그나마 쉽게 먹을 수 있는 메뉴.
요즘은 비빔밥 식당을 찾기가 힘들고 밤늦게는 생선이나 돼지, 소뼈를 우려낸 해장국을 파는 식당들만 있으니 채식주의자들은 편의점이 없다면 한국 여행하기가 힘들 것이다.
밤 열 시 반이었다. 긴 속눈썹을 끔뻑거리며 나를 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배고파요?
-나는 정말 배고파요. 뭘 해줘도 좋아요.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오케이. 일단 앉아요.
영업이 끝났다고 보내면 그만이었다. 다시 음식을 만들려면 청소해 둔 프라이팬을 다시 꺼내 요리를 하고 화구를 다시 청소해야 한다. 귀찮은 일이다. 게다가 한 사람의 밥을 해주려고 그 모든 청소를 다시 한다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면 쉬이 드는 마음이 아니다.
된장찌개백반을 해줄 생각이었다. 때마침 된장을 끓이고 있었으니. 게다가 고기도 하나도 넣지 않은 된장찌개다. 마치 그 사람이 온다는 것을 알고 끓이고 있던 것처럼....
흰쌀밥을 데우고, 된장을 끓이고, 두부를 크고 두껍게 잘라 부치고 양념장을 얹어냈다. 계란 프라이를 반숙으로 익히고 김치까지 내니 된장찌개를 제외한 3첩 백반 완성!
1인용 쟁반에 밥과 찌개, 반찬을 담아 그에게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후후 불며 한 입 먹은 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즈 잇 굿?
-퐌타스틱~
김치의 고춧가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먹은 그가 내 이름을 물었다. 나도 그의 이름을 물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paul. 지금은 비즈니스 트립 중이고 근처 airb&b에서 머물고 있는 중이다.
백반 값은 만원을 받았다. 메뉴에 있던 음식을 팔면 최소 만 오천 원이다.
폴은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실은 우리 가게는 매번 그렇게 백반처럼 차려줄 수 없어!'라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 '내일 오면 채식 비빔밥과 미역국을 해줄게.'라고 말했다.
폴이 돌아가고 주방 청소를 다시 했다.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청소가 생각보다 귀찮지 않았다.
---
다음날 폴은 다시 왔다. 저녁에 급하게 약속이 생겼는데 식당에 오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들렀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은 약속을 지켜준 게 고마웠다. 폴을 위한 비빔밥과 미역국을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매우 비합리적인 손님이다. 그러면 어떠랴. 여행 중에 나를 위한 메뉴를 차려주는 식당이 있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는
두고두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어쩌면 여행 중에 그런 식당을 만나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