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고통에 박수갈채를!

걷기,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7일 차

by 달여리
다잉카우~클로니걸(≈25km)


위클로웨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불안감 때문인지 여섯 시가 되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발목은 괜찮아졌지만 무릎의 상태는 여전했다. 용기를 내듯 두터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마침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거기 있었다. 희망찬 빛깔이 마치 빛나는 응원이라도 건네주는 것만 같았다. 어영차, 몸을 일자로 쭉 폈다. 팔다리도 돌려 긴장을 풀어줬다. 왼쪽 무릎을 도닥였다. 어젯밤 못 바른 안티푸라민을 꼼꼼히 발라주었다.

<용기를 준 아침의 창>

굿모닝, 8시의 아침 식사. 함께 먹는 줄 알았는데 1인분만 차려졌다. 근사한 식탁에서 혼자만의 식사라니, 황송하기가 그지없었다. 빵, 시리얼, 야채, 우유, 주스 등 종류별로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점심도시락으로는 샌드위치와 사과 그리고 생수를 받았다. 식사를 마친 뒤 넉넉히 9시쯤 함께 출발했다. 배가 두둑했다. 배낭 없는 옷차림은 대신 가벼웠다. 이번엔 아주머니께서 데려다주신단다. 길을 헤매시는 바람에 다잉카우까지는 40분이나 걸리고 말았지만, 덕분에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셨다. 하는 김에 아일랜드와 비슷한 제주에 대해서도 소개드렸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부족한 영어지만 손짓발짓 나름 애를 좀 썼다. 그러다 보니 그 40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새 눈앞에 다잉카우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 5시 픽업을 약속했다. 위클로웨이 종점인 클로니걸 마을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린 헤어졌다. 어제 멈춰뒀던 길이 여기서부터 곧장 시작됐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무릎의 통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이대로라면 포기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아팠다. 발을 떼다 말다 떼다 말다, 결국 등산스틱을 펼쳤다. 사실 이번이 첫 개시였다. 불편하고 귀찮아서 계속 외면했었는데 아무렴 진작 쓸 걸 그랬다. 스틱이 생각보다 걸음에 보조가 됐다. 다리의 부담을 팔로 덜어내니 그래도 걸음이 떨어진다. 그제야 가는 데까지 가보겠단 마음을 다시금 먹을 수 있었다. 절뚝거리며 어떻게든 길을 나아갔다.

<세인트피니언스 성당까지의 길>

1시간쯤을 걸었을까. 세인트피니언스 성당(St Finian's Catholic Church)이란 곳에 도착했다. 불편하고 괴롭긴 했지만 걸어가려니 또 걸어갈 수가 있었다. 고통도 적응이 되는 걸까. 하물며 무거운 배낭도 없었다. 비라도 안 오길 천만다행이지. 그렇게 느리지만 착한 아이가 된다. 그만큼 더 천천히 풍경을 감상하려 했다. 11시 20분쯤 되자 도로길에서 빠져 오래되고 낡은 포장길로 접어든다. 울창한 숲의 느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일랜드에는 이런 숲 터널이 아주 흔할 정도로 많았다. 왜인지, 그럴 때마다 싱그럽고 아련한 향수가 느껴졌다.


한껏 절뚝이다 보니 앞으로의 일정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은 오늘의 길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CTC(영국의 Coast to Coast 트레일)에 대한 걱정이 자꾸만 눈앞을 가렸다. 이번의 전체 여행 일정 중 가장 중심에 둔 계획이 바로 이 CTC였기 때문이다. 무릎의 상태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준인 건지 아니면 일시적인 건지. 몸에 대한 판단이 스스로 잘 되지 않았다.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다음’을 위해 준비된 ‘지금’을 미루기가 너무나 아쉽고 아까웠다. 더군다나 이미 예약해 둔 CTC 숙소들 중 이미 취소할 수 없는 곳도 많았다.

<한적한 시골길과 숲 터널>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신호처럼 어느 집에선가 개들이 사납게 짖으며 달려왔다. 보이지 않는 수풀에서 묵직한 소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날아다니는 새들, 윙윙 정신없는 벌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이 자갈처럼 밟혔다. 또각또각 스틱이 지면을 꾹꾹 누른다. 약간의 오르막에도 금세 땀범벅이 됐다.


11시 55분, 라히나킷 숲(Raheenakit Forest)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신발과 무릎 보호대를 벗고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도시락으로 싸주신 샌드위치가 너무 맛이 없어 놀랐다. 에네지바와 킷캣으로 달달함을 따로 채웠다.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가 희한하게 들렸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주거니 받거니 아주 만담을 나눈다. 무릎에 바른 안티푸라민은 큰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여태 9km나 왔다. 앞으로 16km가 남았다. 무릎 상태에도 불구하고 가방이 가벼워서 그런지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다. 어쩌면 등산 스틱이 내는 메트로놈 소리가 응원가처럼 은연중에 힘을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히나킷숲(Raheenakit Forest)>

20분을 쉬었다. 슬슬 무릎보호대를 차고 짐을 추슬렀다. 이어진 오르막이 가파르진 않았다. 자갈의 숲길이 어제 본 듯 모두 비슷비슷했다. 인적 없는 이 고요한 숲에 울리는 거친 숨소리 하나. 그리고 메트로놈을 닮은 등산 스틱. 35분쯤 올랐나,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별다른 전경은 없었다. 양들이 가득한 들판 사잇길로 곧장 내렸다. 무릎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을 더 힘겨워했다. 똑바른 자세로 걸을 수가 없어 엉거주춤 자꾸만 더뎌졌다. 왼쪽 다리에 힘을 뺐더니 또 오른쪽 다리에 점점 더 무리가 된다. 종아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미묘한 집중을 놓치면 곧바로 쥐가 날지도 몰랐다.

<모이리샤와 얼랜즈힐(Moylisha and Urelands hills)>

15분 정도 조심조심 내려오니 시골길로 닿는다. 그러다 또 다른 숲을 만났다. 오후 2시, 모이리샤와 얼랜즈힐(Moylisha and Urelands hills)에 도착했다. 이름만 다를 뿐 다 고만고만한 풍경이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40분쯤 올랐다. 길이 평평해져 이쯤이면 정상이겠구나 했다. 이제 하산이다. 걸음에 더 집중을 했다.

<클로니걸 5km, 숲-밀밭-도로>

3시 10분, 숲을 빠져나왔다. 외진길을 따라 걸었다. 15분 남짓 지났을까, 드디어 간판에 클로니걸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5km 남았다는 표지였다. 이제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길의 끝이 손끝에 매만져 지는 듯했다. 불안했던 가슴에 숨통이 트였다. 무릎에 대한 절망을 잊고, 완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품었다. 스틱의 경쾌한 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릎의 통증마저 덜 느껴졌다.


숲이 점차 옅어지더니 밀밭의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추수가 한창이다. 사방에 뿌려진 먼지가 가득했다. 인도없는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갔다. 마을 근처가 분명한듯 지나는 차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땡볕이 노랗게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안달복달 마음도 달아올랐다.


Welcome to Clonegal!


와우. 영광의 안내판! 4시 반, 그렇게 위클로웨이가 끝이 났다. 마을길을 조금 더 나아가자 작은 공원이 나왔다. 이곳이 127km 위클로웨이의 끝지점이다. 허무하기도 뿌듯하기도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음각의 WICKLOW WAY란 글자가 마치 메달처럼 느껴졌다. 자전거를 타며 지나가던 꼬마 아이가 “유 위클로웨이?”라 한다. "아임 저스트 피니쉬드!"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활짝 마주친 함박미소! 어디선가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클로니걸의 작은 공원, 위클로웨이의 종점>

5시 픽업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공원 내 그늘 벤치에 앉아 두 발 뻗고 편히 쉬었다. 고생한 무릎과도 하이파이브. 어찌 됐건 위클로웨이를 완주했다. 뭐가 됐건 CTC까지 가보기로 이 순간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다시 걷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내일 밤 리버풀로 넘어간 뒤 그 3박 4일 동안 무릎을 잘 보살펴보기로 했다. 완주의 희열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 뭐, 정 걷다 안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면 된다.


정확히 5시에 픽업을 오셨다. 숙소에 도착 후 샤워와 빨래 그리고 6시 반의 근사한 저녁 식사까지. 이제 꿈같은 침대행이다. 아, 진짜 힘들었다. 길이 아니라 몸이 그랬다. 왼쪽 무릎만 아픈 게 아니었다. 내내 긴장했더니 허리와 목, 팔, 다리, 몸 어느 구석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기억이 났다. '그냥' 말고, 걷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생생한 고통을 느끼고 싶다'는 게 바로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체적 고통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건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의 상태와 아픔에 이토록 집중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은 특히 그랬다. 덕분에 길이 아닌 다른 상념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잠들진 않았는데 살짝살짝 꿈같은 걸 꾼다. 갑자기 피식피식 웃음도 나고 그랬다. 아직 밤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갑자기 영화 <와일드>가 보고 싶어졌다. 내일은 걷지 않으니 좀 늦게 자도 괜찮겠지. 이 긴긴밤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잠시 멍 좀 때리다 그래 영화도 때리자. 오늘도 BGM이 참 좋다. 내일이 오기 전에 어서 오늘을 마무리하자. 그리고 말할래,


잘했다. 나 자신.

그리고 무릎

너도.



2024.08.30.

걷기, 위클로웨이 7/7

38,536보(28.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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