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로웨이와 CTC 사이 그 어디쯤
퇴사 후 여행을 떠났고, 어쩌다 보니 여행은 '걷기'가 중심이었다. 일단은 좀 걷고 싶었고, 걷다 보니 걷는 게 점점 더 좋아졌다. 4개월간의 여행에서 4개의 트레일을 걸었다. 15kg의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사진을 찍고 매일 글도 썼다. 걸었던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을 이제 엮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걷는 이야기'다.
회사를 오래 다닌 건 아니었다. 고작 3년이 다였다. 하지만 본질이 훼손되는 심정에 날마다 조금씩 시들어갔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건이 있었거나 한 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만 아는 내가 있었다. 형식적 사회관계가 점점 더 힘겨웠다. 이런 상태를 사회부적응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10년 전에도 똑같았다. 그때도 3년을 다니다 4개월을 떠났다. 이후로는 오랫동안 프리랜서로 지냈다. 이런저런 잡스런 일도 했지만 대체로 사진을 찍어왔다. 다시는 직장 생활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왔다.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살만해져 그만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의 고민이 있었다. 어렵사리 내린 큰 결심이었다. 아내도 이해해 줬다. 사실 아내가 먼저 한 제안이었다. 퇴직금과 약간의 종잣돈으로 떠났다. 어쩌면 '걷기'는 지난 10년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신체적 괴로움이 필요했다. 생생한 삶의 촉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떠난 이 여행을 <비고>라 부르기로 했다.
비고(b-go)는
다음 챕터(Side-b)의 시작(go)을 의미하며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인 'be going to'이자
준비를 위한 참고가 될 비고(備考)를 뜻한다.
그리고 이 여행 기록에는 <비수기>라 이름 붙였다.
비수기(非需期)는
새로이 맞이할 다음의 시간(off-season)이자
동시에 두서없이 남겨진 여행의 기록(B급 手記)이다.
여행 <비고>와도 '비'자 돌림이다. 안성맞춤 네이밍이 됐다.
2024년 7월 말에 그만두고 8월 초에 떠났다. 암스테르담과 브뤼셀, 런던과 이스트본을 거쳐 더블린. 그리고 7일간의 위클로웨이가 이제 막 끝이 났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차례다. CTC로 가는 경유지로 리버풀을 택했다. 다시 영국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비수기>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클로웨이가 끝난 뒤 넘어온 리버풀은 춥고 흐렸다. 다리의 상태는 심각했다. 잠에서 깰 만큼 무릎이 아팠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리버풀을 구경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움직인다기보다는 멈춘다에 가까운 느낌으로 걸었다. 다리를 거의 끌다시피 그렇게 도시를 배회했다. 미술관이며 축구장이며 대성당이며,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열심히 바른 안티푸라민과 느린 도시 배회의 재활 운동 덕분인지, 3박 4일 만에 무릎은 의외로 호전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맥주도 마셨다. 펍에서 축구경구도 신나게 봤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또 아니어서, 15kg의 배낭을 메고 17일 동안 CTC의 산간지역을 걸을 자신은 잘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룰 수도 없는 노릇. 영국 CTC(Coast to Coast Walk)는 이번 여행의 가장 핵심이었다. 꼭 가고 싶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꼭 가야만 했다.
세인트비스행 열차 티켓을 끊었다. 예정대로 내일 CTC의 시작점으로 간다. 걷다 정 안되면 중도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시작은 해보기로 이미 결심했다. 짐은 진작에 다 싸두었다. CTC 일정도 다시 한번 정리해 뒀다. 아직 숙소를 잡지 못한 곳도 몇 있었다. 가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믿었다.
리버풀을 떠나려니 아쉬웠다. 이틀 뒤 시작될 길이 두렵기도 한 밤이었다. 비틀스가 해체하며 “모든 아름다운 것에도 끝은 있다.”라고 했던가. 모든 끝에는 또한 시작이 있지. 그것이 아름다울지 아닐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지만.
맥주 덕분인지 눕자마자 기절했다.
어쨌든 내일은 온다.
그리고 그 길 위에, CTC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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