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 잘했다는 생각, 우선은

CTC의 시작점, 세인트비스

by 달여리

영국의 북부를 횡단하는 CTC(Coast to Coast Walk)의 시작점으로 향하는 날의 새벽. 일찌감치 일어났다. 빈 침대 하나 없이 도미토리방은 가득했다. 모두가 곤히 자고 있었다. 2층 침대에서 조심조심 내려와 세수와 양치부터 했다. 배낭은 어젯밤 모두 싸 놓았다. 걸어둔 옷가지와 벗어둔 등산화, 콘센트에 꽂아둔 충전거리까지 챙겨 로비로 완전히 나갔다. 미리 사둔 냉동식품을 데워 아침으로 먹었다. 안티푸라민으로 무릎 마사지를 열심히 했다. 가방을 마저 매무새 한 뒤 망설임 없이 체크아웃을 했다. 버스터미널까지는 1.5km 정도였다. 무릎 테스트 겸 배낭을 메고 찬찬히 걸어가 보았다. 무게의 부하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걸을 만은 했다. 최대한 조심했다. 역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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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톤을 거쳐 칼라일로>

아, 맙소사. 난데없이 난감한 일이 생겼다. 열차가 취소된 걸 역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타려던 건 리버풀에서 칼라일(Carlisle)까지 간 뒤, CTC의 시작점인 세인트비스(St.Bees)행 기차로 갈아타는 환승 티켓이었다. 일정 전체가 취소된 것도 아니었다. 리버풀에서 칼라일까지 가는 기차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운행이 취소되었다. 어젯밤 메일이 왔었던 걸 미처 몰랐다. 열차 예약 관련 광고 메일이 너무 많이 와 별수롭지 않게 넘겼던 게 문제였다.


안내 데스크로 가서 물어보니 프레스톤(Preston)이라는 곳까지 간 다음 칼라일행 기차로 갈아타라고 한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듯 티켓은 다시 발권하지 않아도 된단다. 운행표를 확인해 보니 프레스톤 도착 후 7분 안에 칼라일행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칼라일에서 세인트비스로의 환승 대기가 원래는 1시간이었는데 그것도 20분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빠뜻해 보였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새로운 표를 사려니 원래의 티켓의 거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플랫폼이 서로 멀지 않기를, 기차가 서로 지연되지 않기를,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폐가 있지만 영국 열차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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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로 향하는 창밖 풍경>

연착을 하긴 했다. 프레스톤에는 예정된 시간보다 2분 늦게 도착했다. 갈아탈 기차는 바로 건너편 플랫폼이었다. 계단을 올라 한 번만 건너가면 됐다. 쉴틈은 없었지만 타이밍은 딱 맞았다. 기차는 거의 금방 출발했다. 칼라일로 가는 열차의 최종 목적지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였다. 깜빡 놓치면 스코틀랜드까지 가게 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설렜다. 가다 보니 창밖 풍경이 위클로웨이와 비슷하다. 구글 지도에 현 위치를 찍어보니 기차는 CTC 루트를 관통하며 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풍경은 바로 CTC 9일 차에 머물 켈드(Keld) 근방의 어딘가였다. 걷기도 전에 감회에 잠겼다. 마치 이미 지나간 미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아련했고 문득 두근거렸다.


칼라일에도 10분 늦게 도착했다. 남은 10분이면 열차를 갈아타기엔 충분했다. 세인트비스행 기차는 두 량짜리 아주 작은 시골 열차였다. 구식 소음과 퀴퀴한 냄새, 낡은 창문과 꺼진 등받이 쿠션에서 그 옛날의 무궁화가 떠올랐다.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열차 캔슬로 긴장했던 몸이 이제야 스륵 풀린다. 어제 미리 알았더라면 오히려 비싼 티켓을 다시 구매했을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마음을 졸였지만, 지나고 보니 이게 나았다. 이미 무사히 잘 가고 있었다. 정말-정말로 세인트비스로 향한다. 일찍 일어나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밀린 잠이 와르르 몰려왔다. 한껏 나른했다. 내내 흐렸던 날씨가 오늘따라 따스해 아무래도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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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비스로 향하는 두 량짜리 열차는 해안을 흘렀다>

갑자기 창밖으로 바다가 흐른다. 해안를 따르는 기찻길이라니, 생각지도 못해 놀라웠다. 기차는 아이리시해를 오른쪽에 끼고 영국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낭만도 이런 낭만이 없다. 철컹이는 소리를 음악 삼아 유유한 바다를 가만히 감상했다. 그만 기분이 상냥해지고 말았다. 잠은 어느새 다 달아나고 없었다. 화이트해븐을 지나 세인트비스로 달린다. 가슴이 무턱대고 쿵쾅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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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끝 작은 마을, 세인트비스에 도착하다.>

디스 스탑 이즈 스비.


세인트비스의 현지 발음은 ‘스비’인가 보다. 글자로만 봤던 영국 서쪽 끝 마을에 드디어 도착했다. 아주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거나 방이 없다고 했던 숙소들은 모두 역 주변에 모여있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낙담했었는데 다행히 아고다에서 검색되는 호텔이 하나 있었다. 해안에 닿아 있는 그 호텔까지 가려면 여기서 조금 걸어 나가야했다. 그전에 이 마을의 유일한 슈퍼에 들러 간식용 초콜릿을 좀 샀다. 특별히 더 둘러볼 건 없을 것 같았다. 곧장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한가로운 길이었다. 초원의 한낱 풀조차 이 여유를 즐기는 듯, 모든 것이 느려 보였다.


그리 멀지 않았다. 바닷가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가까이 몰려왔다. 잿빛 수면 양옆으로 근사한 절벽이 화르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을 영국의 서쪽 끝이라고 해도 될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진다. 날씨 덕에 스산함이 더해졌다. 망망한 바람이 옷깃이 물결을 일으켰다.

<CTC의 시작점, 웨인라이트 벽>

Start of Coast to Coast Walk


먼저 웨인라이트 벽(Wainwright Wall) 앞에 섰다. 여기가 바로 CTC의 시작점이다. 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이 길의 창시자 창시자 알프레드 웨인라이트(Alfred Wainwright)의 얼굴도 붙어 있다. 여길 오다니, 진짜 오다니! 실감이 잘 안 났다. 걸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뜨거워지는 뭔가도 가슴속에 불었다. 세상의 끝을 손 끝으로 매만져졌다.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바라봤다. 황량하디 흐린 바닷가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바람에 기대듯 마음을 진정시켰다.


강아지와의 산책, 아이들의 웃음, 낮은 파도 소리와 화아- 갑자기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 다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쓸쓸하나 너무 어둡지만은 않은, 조용하나 완전히 고요하지만은 않은. 그런 적당함. 바닷가와 맞붙은 언덕 위에 웬 간이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구경도 할 겸 올랐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사 왔다. 바다 곁에 앉아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길의 화살표 방향대로 미리 시선으로 따라도 가봤다. 내일 첫걸음을 디딜 언덕길이 한 눈에도 가팔라 보였다. 그렇다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며 벌써부터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언덕에서 시선을 거둬 애써 바다로 고정시켰다. 아직 두 신데, 적어도 대여섯 시는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텔 체크인까지는 아직도 1시간 반이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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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끝 바다 풍경>

점점 추워져 더 이상 해안가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세 시가 되기도 전에 일단 호텔로 들어갔다. 막상 와보니 내일 길을 바로 걷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직원분들도 친절하셨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른 체크인을 해주신다. 호텔에 레스토랑도 딸려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저녁식사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방은 작지만 깔끔했다. 와이파이도 나름 잘 됐다. CTC 의지를 다지며 머리를 깎고 샤워도 했다. 양말과 팬티는 빨아서 라디에이터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누워서 한동안 쉬었다. 보고 싶은 이들과의 통화, 이런저런 정보들의 검색. 쉴 땐 왜 이리 시간이 잘 가는지. 서쪽 끝의 일몰을 보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직 하늘은 흐렸다. 내일은 비 예보까지 있었다.


잠시 햇빛이 나는가 싶더니 다시 흐려졌다. 추웠다. 여섯 시 저녁시간에 맞춰 긴 바지에 바람막이까지 입고 나왔다. 예약해두길 잘했지, 다들 어디서 나왔는지 호텔 레스토랑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칼스버그 파인트로 시작했다. 8-90년대 팝 음악이 흥겨웠다. 근데 어째 한 시간째 메뉴가 안 나온다. 분명 앉자마자 웨이터에게 주문했는데, 이제와 하는 말이 식사는 바에서 직접 주문을 따로 해야 된단다. 맥주랑 메뉴를 같이 주문했는데, 아무 말없이 맥주만 주문만 덜렁 받은 셈이었다. 중간중간 확인할 때도 곧 나오니 기다리라고만 하던 그 웨이터. 어이가 없었지만 웃어넘겼다. 웃으니 그녀도 함께 웃더라. 어쩌겠는가. 덕분에 맥주 한 잔을 더 마신다. 큰 턱 내듯 후하게 저녁을 먹었다. 위클로웨이를 교훈 삼아, CTC에서는 비싸더라도 식당의 기회는 되도록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걷는 대신 누리는 호사, 나쁘게 말하면 차선책 없음. 어차피 잔뜩 흐린 하늘, 일몰은 진작에 포기했다. 구식 노래에 몸을 맡기듯 느긋이 저녁을 즐겼다. 밤은 금방 찾아왔다.

240903_A1_100(edit2)(resize).jpg <서서히 저무는 시간>

식사를 다 마쳤다. 밤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다. 바다로 나서는데 금세 비바람이 불어왔다. 10m도 안 가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방에서 안전한 밤을 보내는 게 낫겠다. 어매너티로 구비된 홍차 티백으로 입가심을 했다. 매일의 정리를 하고 음악도 들었다. 호화로운 저녁식사에 든든히 배가 불렀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자꾸 올라왔지만, 신나는 노래로 바꿔 애써 텐션을 올렸다. 무릎의 상태가 불안하긴 불안했다. 오늘 보니 그래도 조심조심 걸을 만은 했다. 미리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걷다가 정 안되면 중간에라도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짐들은 미리 배낭에 정리했다.


미지의 세계인 CTC를 기다린다. 어떤 결과가 되었건 길은 이미 시작된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창밖으론 반사된 얼굴만이 또렷하게 떠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불안과 설렘이 동시에 있었다. 그런 밤이었다. 그럼에도 기대가 컸다.



2024.09.03.

CTC 0일차

이동 to 세인트비스

8,608보(5.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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