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로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by 고순


가슴속에 묻어둔 로망이 하나 있다. 그건 창밖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창문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CD플레이어를 들으면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는 것이다. 가족들이랑 함께 살 때 공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만 담아뒀다. 그런 날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CD를 몇 개 모았다. 그 CD는 내 작은 방 선반 위에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작은 먼지와 함께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CD를 꺼내 듣게 된 건 작년 여름쯤부터였다. 작년 여름부터 자취를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로망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베란다의 큰 창문으로 보이는 도시 거리와 하늘이 적당한 밸런스를 이뤄 좋은 뷰를 만들어 냈고 흔들의자를 놓을 수 있는 넓은 거실과 아무 때나 CD를 꺼내 들어도 방해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사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CD플레이어와 흔들의자를 샀다. CD플레이어를 구매하려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찾아보니 CD플레이어는 이미 옛날 기술이라서 굳이 돈 주고 새거 살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봤다. 그래서 나는 신품이 아닌 중고 매물을 찾기 위해 당근마켓을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은 매물이 있길래 당장 샀다. (가격 좋은 매물은 금세 나갔는데 나처럼 CD플레이어를 찾는 소비자가 많다니.. 신기했다.) 30분 정도 걸리는 옆 동네 가서 직거래를 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을 잊지 못한다. CD를 얼른 들어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아서 산책을 앞둔 강아지처럼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다른 할 일을 다 내팽개치고 CD플레이어 전원을 꼽았다. 이때까지 장식품에 불가하던 CD앨범을 사용할 때가 온 것이다. 투명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칼로 벗겼다. 앨범을 열어보니 CD와 속지가 가지런히 있었다. CD 위로 파란색과 연노랑색이 태극문양으로 섞여있는 디자인이 맘에 들었고 CD 뒷면에 뿜어져 나오는 영롱한 빛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CD플레이어 뚜껑을 열고 CD를 넣고 뚜껑을 닫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터치로 음악을 재생시키는 스마트폰과 달리 내 손으로 직접 음악을 재생시키는 기분은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뭐라고 할까 모든 절차를 행하고 있는 손가락의 감각이 좋았다. CD 돌아가는 소리가 가볍게 새어 나오더니 “Bill Evans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의 피아노와 베이스 소리가 나지막하게 툭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로 흔들의자에 앉아 해가 수평선으로 사라져 가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노래를 들었다. 아무도 내 귀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좋았다.


그때의 시작으로 반년만에 모은 CD가 9개가 됐다. 솔직히 말하면 CD를 더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쉽게 소비해 버린다면 구매한 CD의 가치가 낮아질 거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매조건을 나름 깐깐하게 선정했다. 제일 먼저 앨범의 트랙리스트 중 8할 이상이 내 마음에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이상정도는 돼야 CD 앨범으로 갖고 싶다는 소유욕이 생긴다. 2~3곡 정도 좋은 노래로는 내 맘을 사로잡을 수 없다. 그리고 CD플레이어는 정직하게 순차재생으로 진행된다. 맘에 안 드는 곡이 많다면 다음 곡을 넘기는 횟수도 자주 발생할 텐데 그런 경우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가사 없는 앨범을 사는 것이다. 지금 갖고 있는 9개 앨범 중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앨범을 제외하고는 다 연주 앨범에 가깝다. (스튜디오 지브리 앨범은 친구에게 선물 받았으니 따지고 보면 내 돈 주고 산 건 없는 셈이다.) 왜 가사 없는 앨범을 사고 싶은지 정확히 딱 꼬집어 낼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일단 가사 있는 앨범보다 없는 앨범이 덜 질릴 거 같았다. 가사가 만들어 낸 감정도 좋지만 가사 없이 연주에서만 느껴지는 감각이 더 다채로운 감정을 샘솟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리고 책을 읽거나 다른 행동을 할 때 언어가 없는 음악이 듣기 좋다. 이런 조건 때문에 갖고 싶었던 국내앨범도 사지 않고 있다.(검정치마와 가을방학, 윤지영, 권진아 앨범을 갖고 싶지만 참는 이유다. ) 결과적으로 2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CD앨범은 많지 않다. 지금까지 고심 끝에 모은 9개의 CD앨범은 애정을 갖고 아주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


나는 보통 노래를 들으면 단물 빠질 때까지 듣는 타입이다. (대체적으로 가사 있는 노래가 그렇다.)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 되는데 이렇게 들으면 노래애 빠져 있던 시간들이 머리에 강력하게 남는다. 그래서 나중에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좋다. 무언가에 추억이 깃들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듣다 보면 노래가 금방 질리게 된다. 아무리 좋아해도 계속 빠져드는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다. 그건 감정이 만들어 낸 감각의 수치는 무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2~3주 정도면 강력한 감정은 서서히 사그라진다. 그런 것처럼 CD로 음악을 듣는 것도 비슷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 때문에 CD를 가끔 꺼내서 듣는다. 그건 아날로그의 힘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디지털이 편리하다고 해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아닐로그의 느낌을 완벽하게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직접 산 CD앨범에서 느껴지는 추억과 내가 직접 실물로 소유하고 있다는 감각은 CD를 더 사랑하게 만든다. 머리맡에 놓인 CD플레이어와 침대 맞은편에 놓인 선반 위에 꽂혀있는 CD앨범을 볼 때면 오래된 연인처럼 여전히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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