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씨를 잘 못 쓴다. 그래서 펜으로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해도 글 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악필인 내 글을 다시 보기 싫다고 해야 하나 내 글씨에 대해 약간의 자조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키보드로 글을 쓰는 건 좋아한다. 깔끔하게 타이핑된 문장은 눈도 즐겁고 문장을 쓰는 것도 즐겁다.
최근 회사에서 서류를 작성할 일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펜을 잡고 글씨를 쓰려는데 기분이 달랐다. "내가 글씨를 너무 성급하게 쓰는 건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글씨를 써봤는데 엉망이던 평소 글씨와는 다르게 제법 괜찮았게 썼다. 여태까지 글씨한테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스스로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무슨 일인 걸까. 전에도 정성 들여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지금 같은 기분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특히 편지를 쓸 때마다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또박또박 이쁘게 쓰겠다고 다짐한 내 왼손은 오히려 힘이 잔뜩 들어가 삐뚤삐뚤 글씨를 토해내더니 편지지를 너저분하게 만들었다. 오늘과 그전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좀 더 고민해 보니 둘의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성급함 때문이다.
전에 글을 쓸 때 천천히 쓴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글을 쓸 때는 획 끝부분을 날려버리기 일 수였고 획을 제대로 끝 맞춘 다음에 다음 글자를 써야 하는데 음절과 음절사이의 간극을 숨 쉴 틈 없이 이어버렸다. 그래서 이쁘게 쓴다고 심혈을 기울였지만 그건 마음만이었을 뿐 결국 글씨는 개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펜을 가볍게 쥐고 있어서 손도 안 아팠고 획도 끝까지 집중하면서 썼다. 또 음절이 넘어갈 때마다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오늘로써 글씨를 휘갈겨 쓰는 태도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런 성급한 태도는 글 쓸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책을 읽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빨리 완독 해야지. 지금 책 어느 정도 읽었지. 이 정도 분량이면 언제 다 읽지. 빨리 다른 책도 읽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하는가 하며 영화를 볼 때도 아직 영화 시간이 몇 분 남았다는 걸 의식하거나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마주하고 있을 때는 언제 다 보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책을 대충 읽은 건 아니지만 분량이 많은 책이거나 읽다가 지루해지면 손을 떼거나 정적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내 성급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게임할 때 성급함이 제대로 드러났다. 최근 메이플랜드라는 RPG게임을 했는데 요즘 나오는 게임처럼 쉽게 성장하는 게 아닌 순수 시간과 열정을 요구하는 게임이었다. (소위 노가다 게임이라고 한다.) 옛날처럼 느긋하게 퀘스트 깨면서 추억을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게임을 시작하고 나니 "지금 사냥해서 언제 레벨 업하지. 퀘스트 깰 시간이 없어 아까워. 무조건 효율적이게 사냥해야지 공략 봐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즐긴 모험을 다시 느껴보지 못하고 단순 반복으로 사냥만 하다가 그만뒀다.
스타듀밸리라는 농장경영시뮬레이션 게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농사하면서 느긋하게 힐링하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돈이 얼마 모이고, 내일은 광석을 캐야 하고, 이걸 만들려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고, 남는 시간에는 낚시라도 해서 물고기라도 팔아야지, 자기 전에 농사 숙련도 올려야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마을 사람들과 소소하게 친밀함을 가지면서 힐링하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성급함, 시간의 효율을 따지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정보다는 목표만을 쫓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당연하게 실제 성격도 성급함이 좀 배어있다. 헬스는 1시간 이상하고 싶지 않아서 1시간 안에 몽땅 해결하려고 하기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뭔가 생산적인 걸 해야 된다는 강박도 조금 있다. 말하는 것도 비슷하다. 말문이 트이면 수도꼭지처럼 콸콸 말을 쏟아내기도 하고 대화 주제를 확확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너무 많은 말을 소비한 나머지 일기에 "말을 최소한으로 하자,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하자,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라는 내용을 쓰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을 성급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성급함이 나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평생 몸에 밴 성급함을 덜어내는 것이 내게 필요했다. 그래서 요즘 무언가를 할 때 천천히 차분히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면서 지금을 상기시키고 있다. 단순히 천천히 하는 게 아닌 지금 행동을 100%를 다 느끼려고 노력하겠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 같다. 또 알게 모르게 계산적인 사고방식으로 행동을 시간에 껴 맞추는 태도도 덜어내고 있다.(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이렇게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이라는 순간을 다시 천천히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