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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칼 May 10. 2024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

엄마와 초등 아들이 떠난 동상이몽 자전거 여행 - 춘천 편

자전거길 시작 지점 옆으로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국토 종주 자전거길에 있는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첫 도장을 찍고 국토 종주 자전거길의 시작을 알리는 무지개 모형의 START 표시 앞에 섰다. 그곳엔 사이클복장을 잘 갖춰 입은 외국인 4명이 있었다. ‘저들은 어떻게 알고 왔을까? 어디까지 갈 예정일까?’ 궁금했지만, 환이가 출발하는 바람에 묻지 못했다. 자전거 안장 위의 환이 엉덩이가 씰룩이며 ‘나 지금 신나!’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한다. ‘엉덩이에도 표정이 있을 수 있구나!’ 페달을 굴려 환이 뒤에 바짝 다가가서 한마디 했다.

“아들,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가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어디서 묵어야 할지 정해진 것도, 지켜야 할 시간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는 여유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긴 장마 직후여서 그랬을까? 달리는 한강공원 자전거길 위까지 물이 찼던 흔적이 있다. 뿌리째 뽑힌 나무와 비탈에서 흘러 내려온 흙이 곳곳에 쌓여있지만, 자전거길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된 상태였다. 

    

“엄마, 엄마, 저기 보이지? 제2 롯데타워. 우리가 롯데월드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어. 롯데월드는 하루면 충분해!”

작년 일 년 동안 내가 국토 종주를 꿈꿨을 때 환이는 놀이동산 종주를 계획했다. 

“엄마, 자전거만 타면 무슨 재미가 있어? 국토 종주 가면서 놀이동산도 가자.” 

거실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환이의 나름 치밀한 계획이 적혀있다.     


집 → 롯데월드(45km) → 서울랜드(18km) → 한국민속촌(47km) → 에버랜드(20km) → 대구 이월드(290km) → 경주월드(97km) → 통도 환타지아(87km) → 마산 로봇랜드(169km) →      


이번 여행은 우리가 하루에 어느 정도 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함으로 놀이동산은 패스하기로 했다. 롯데타워를 뒤로하고 계속 달렸다. 오후 5시쯤 되니 엉덩이가 슬슬 아프고 배도 고팠다. 자전거길 옆 잔디밭에 돗자리를 폈다.

“엄마, 여기 누워봐! 진짜 편해.”

돗자리를 깔자마자 환이가 벌러덩 누워 나를 불렀다. 혼자였다면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눕는 걸 주저했을 텐데, 환이의 한 마디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둘이 함께 하니 바닥에 눕는 것조차 즐거웠다. 아이로만 생각했던 초등 3학년 환이가 처음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가져온 과자와 초코바를 먹으며 구글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는 서울의 끝자락, 15km쯤 가면 팔당대교다.

“아들, 오늘은 팔당대교를 목표로 하자.” 

    

두 시간쯤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이만큼 왔다는 성취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간식을 먹고 ‘아자!’를 외치며 우리는 페달을 굴렀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렸을 때 우리는 멈춰 섰다. ‘이런!’ 더는 갈 수가 없다. 장마로 불어난 물이 팔당대교로 통하는 자전거길을 가로질러 흘렀다. 건너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건너오려던 남자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채 자전거를 번쩍 들고 물길을 건너고 있었다. 성인 남자 발목 위에서 갈라지는 물살은 힘이 넘쳤다. 물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강한 유속 때문에 건너오던 남자가 두어 번 휘청이는 것을 보았다.   

  

“이 길이 춘천 가는 길인가요?” 주변에서 운동하던 사람에게 물었다.

혼자라면 건너오던 남자처럼 자전거를 끌고 건넜겠지만, 환이가 건너기엔 위험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행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멀뚱히 서 있는데, 옆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저쪽으로 쭉 가다 보면 팔당대교 넘어가는 다른 길이 있어요. 좀 돌아가야 해요.”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안전이 최고였다. 15분을 돌아 팔당대교 아래에 도착했다.   

  

역경을 딛고, 팔당대교 앞에 서니 배가 고팠다. 한 시간 정도 후면 해도 질 시간이다. 집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이게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생각이 간절했다. 얼른 저녁을 먹고 힘을 내고 싶었는데 주변은 온통 갈대밭뿐 음식점이 보이질 않았다. 자전거 여행 전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편의점과 식당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순간 돈은 그냥 종이에 불과했다. 밥을 맛있게 먹겠다고 지나친 마지막 한강 편의점이 그리웠다.

     

‘여긴 어디? 나는 왜 여기 있을까?’ 후회가 밀려오는데, 앞서가던 환이가 외친다.

“엄마, 너무 배고픈데 칼국수 먹고 가자.”

평소에서 주변을 잘 두리번거리며 다니는 환이가 팔당대교에서 하남 시내로 통하는 굴다리에 붙어있던 ‘칼국수 100m’라는 작은 표식을 봤다. 배고프고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환이도 그 표지판이 반가웠나 보다.

“여기에 맛집이 있으면 대박인데.” 아이의 목소리에 드디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묻어났다. 나는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컴컴한 굴다리를 지나며 ‘칼국숫집 문이 닫혀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뭘 먹어도 맛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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