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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May 25. 2024

지극히 평범한 줄 알았던 한 가족

10년 이상 쉬지 않고 달려온 서영의 삶에

기꺼이 쉼이 허락되었다.

서영은 원하던 대학원에 합격하였지만

격의 기쁨도 잠시였다.

학원 일을 하며 번 돈은 모두 부모님을 도왔기에

서영에게는 저축해 놓은 돈이 없었다.

대학원 학비가 상당했지만

그렇다고 일과 병행을 하기는 싫었다.

온전히 학업에 집중하고 싶었으며

잠시라도 입시 경쟁구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과외를 하기로 결정했다.

학원강사 시절 많은 과외제안을 받았었다.

그러나 학원 수업을 하며

과외까지 할 심적,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가까운 지인에게 과외자리를 부탁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중2학생의 영어과외.

과외비도 적지 않았고 중2학생이라 수업준비 할 것도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중학생이니 입시와는 관련이 크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영이 살던 논현역 근처

서영의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241B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학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대학원 수업이 없는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학생의 집에서 과외를 시작했다.


아빠, 엄마, 중2 아들, 초등학교 2학년 딸 그리고 할머니도 함께 사는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의 한 가족


아버지는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사업을 하셨고 지금은 잠시 쉬시는 중이라고 했다.


꽤 큰 평수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한 후 제일 끝에 있는 학생방으로 들어갔다.

문 바로 옆에 놓인 책상 그리고 방 양쪽으로 놓여 있는 꽤 넓은 옷장

방 한가운데에 놓인 밖이 하늘이 훤히 잘 보이는 널찍한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여동생은 많이 어려 보였다.

서영이 집에 들어올 때 거실 바닥에 엎드려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집안에 누군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니 많이 어린 나이 같았다.

그렇게 여동생은 계속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

짧은 머리

덩치가 좀 있는 큰 키를 가진 학생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중학교 2학년 남학생


그의 이름은 도연이라 했다.

도연은 서영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책상 안쪽으로 앉았다.


서영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도연의 영어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 위해 준비해 간 독해 지문을 읽혀보았다.

도연은 전혀 읽지를 못한다.

몇 단어를 콕 집어 뜻을 물어보니 중2학생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history를 모른다.

심지어 student의 스펠링도 모른다고 한다.

갑자기 서영의 머리가 하얘진다.

수업준비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되었기에

수업 자체가 편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이의 영어 실력은 신경이 쓰인다.

이 정도로 영어에 손을 놓은 학생이라면 서영이 곤란해지는 일이 생길 수 있도 있기 때문이다.

비싼 과외비를 들여 수업을 하는데

학생의 영어실력이 단기간 향상되지 않으면

그 어떤 부모도 좋아하지 않는다.

서영의 실력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중2학생인데 student의 스펠링을 모른다는 것은 공부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영어는 input이 중요하다.

input이 충분히 쌓이지 않으면 output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input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영어 단어, 영어 문장 암기이다.


서영은 도연에게 단어 암기 숙제를 내주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교과서의 출판사와 다가올 기말고사 날짜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도연에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해주시는 필기를 무조건 열심히 받아 적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1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 건너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 버스를 기다리며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서영이 어린 시절 살았던 강북도 아닌

지금 살고 있는 강남도 아닌

동구 하왕십리.

처음 와보는 동네이다.


서영의 어린 시절

가수 김흥국의 59년 왕십리라는 노래가 있었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그때 그 왕십리가 바로 이곳이구나 생각하며 집에 가는 버스를 탄다.


서영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30분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한다.

중2학생이 student 스펠링을 모른다.

언뜻 생각해 봐도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왜 영어과외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단순한 의문이 든다.

물론 서영에게 필요한 대학원 학비에 큰 도움이 되는 과외라 열심히 수업해 봐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꼭 영어과외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무언가 좋아하는 것이 있을 텐데


도연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는 것일까?

영어수업을 하는 1시간 내내 도연은 웃지 않았다.

예의 바른 학생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즐거워하지 않았다.

영어와 관련된 재미있는 농담을 하거나 신박한 단어암기 방법을 알려줘도 도연은 요지부동이었다.

질문을 하거나 심지어 다른 얘기도 하지 않았다.

수업 내내

도연은 조용했고 서영이 하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2번째 수업

숙제로 내줬던 영어단어 암기가 잘 되었는지 확인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노력한 흔적은 보였다.

그렇게 두 번째 수업도 그저 그런 지루한 강의식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서영은 자연스럽게 도연에게 진로를 물었다.

아직은 한 참 먼 얘기인 것 같지만 서영처럼 일찍 재능이 발견되고 진로가 정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연이 고개를 든다.

그때서야 도연의 눈에서 빛이 난다.

영어수업을 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연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며 본인의 재능을 설명한다.


예체능 방면에 너무나 큰 재능을 갖고 있던 도연은 예고를 가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했다.

중2밖에 안 된 학생이 이렇게나 명확한 꿈과 방향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니 듣는 내가 너무나 기뻤다.


어떤 방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격려해 주었다.

비록 student 스펠링을 모르는 중2라 할지라도 무조건 괜찮다.

너에게는 세상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을

너만의 꿈이 있으니

 방향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서영은 도연에게 최근에 읽은 책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도연아, 혹시 미엘린층이라고 들어봤니?"

"아니요 그게 뭐예요? 처음 들어봐요."

"인간의 모든 세포의 단면을 잘라보면 미엘린 층이라는 구조를 볼 수 있대. 사람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감정을 느끼고 이런 모든 것은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를 통해 이동하는데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게 미엘린층이야."

"근데 그게 왜요?"

"너의 재능이 무엇이든 간에 정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미엘린층이 두꺼워진대.

천재? 별거 아니라는 거지.

너의 재능을 정확히 발견하고 꾸준히 멈추지 않고 연습하고 계발하는 것.

천재의 비결은 그게 전부라고 책에 나오더라.

아주 간단하지?

네가 원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

그게 다래!!"

"아. 네."

"나한테는 영어가 그래. 난 정말 영어가 재밌거든. 그런데 영어 못해도 괜찮아. 넌 한국말 잘하잖아. 영어 좀 못하는 거 전혀 주눅 들 일이 아니야. 너에겐 네가 잘하고 즐기며 자랑할 수 있는 재능들이 있잖아. 영어는 그냥 조금만 노력해 보자. 네가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말이야 아주 조금만. 알겠지?"


서영은 도연이 영어공부를 '조금은'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80세가 넘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한 물리학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영어를 잘했더라면 이 노벨물리학상을 20년은 더 일찍 받았을 겁니다"


학생들이 영어공부에 지치고 힘들어할 때면 서영이 늘 얘기해 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늘 학원 교실 한 벽면에 붙어있는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끝난다.


"너희들의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전 세계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서영이 이렇게 얘기하면

길고 긴 하루로 축 쳐진 아이들이 조금은 힘을 내는 듯 보인다.


그들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왜 영어, 수학, 국어에 이리도 목을 매고 있는 것일까?


다이빙 선수는 전력질주하여 스프링보드에서 힘껏 점프한다.

도약 시 정점의 높이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큰 점수를 얻는 것처럼

수능과 내신은

학생들의 꿈을 힘껏 발휘할 수 있는 도약대

즉 '발판'일뿐이다.


서영은 늘 이런 식으로 공부가 재능도 아닌 학생들에게 그럴듯한 말로 수능과 내신의 공부이유를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돈을 벌어왔다.

그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잠시 쉼을 택했지만

학생들을 구워삶던 말재간은 몸이 기억하나 보다.

Student스펠링도 모르던 도연은

서영의 말을 듣고 갑자기 힘을 얻었다고 한다.

리고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영어에 관심도 없고

새로 온 과외선생님에게 호기심도 없으며

그저 예의만 바른 줄 알았던 학생인 줄 알았는데

도연은 본인의 재능 얘기에 한 껏 얼굴이 상기되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누군가의 재능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관찰에 의해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고

노력하며 능동적으로 발견해 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발견되기 힘든 그 재능을 찾았으니

 재능에 집중하고 

방향성에 맞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고 가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정확히 얘기했던 도연

신나게 본인의 꿈과 재능을 얘기하는 도연도

바로 옆에서 들어주는 서영도 기뻤다.


그렇게 첫 번째 수업과는 달리 기쁜 마음으로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도연의 아버지


도연과는 다르게 왜소한 체구에 작은 키

무표정으로 인사하시던 도연의 아버지는

조금은 엄해 보였다.


간단하게 인사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이 1층까지 내려갔다.

별말씀 없으신 도연의 아버님이

어렵게 한마디 하신다.


"판검사 시킬 거니 잘 좀 부탁합니다."

" 아, 네. 열심히 지도할게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영은 기계처럼 대답은 했지만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판사면 판사고 검사면 검사지 판검사는 도대체 무엇일까?


서영의 할머니도 어렸을 때 그런 얘기를 하셨다.

우리 서영이는 판검사 인물이라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정확히 알고 있다.


판사든 검사든

조인이 되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다는 것을.

자진하여 세상과의 고립을 선언한 후

몇 년 동안 7 법 및 선택과목

그리고 그에 따른 수십 만개의 판례들을

하나하나 공부해서 사법시험을 패스한다.

그 당시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는

국내 굴지의 한 은행에서 1억을 무이자로 대출해 준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 기쁨도 잠시

합격생들은  곧바로 시작되는 2년의 연수원 생활동안 1000명의 연수원생들과 함께

또 한 번 경쟁을 해야 한다.

2년의 연수원 시절이 끝나는 순간

1등부터 200등까지 등수를 매겨

 그 정도 되는 인원만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가 된다는데.

이렇게 엄청나고 험난한 과정이

과연 '공부'에 대한 재능 없이 가능한 일일까?

공부도 재능이다.



서영이 딱 2번 만난 도연은 예체능에 능한 학생이었다.

스키, 그림, 패션, 음악까지 관심분야가 방대했다.

딱 2번 만난 서영도 도연의 뚜렷한 재능과 진로가 보이는데 학생의 아버지라는 분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한 후 서영은 버스에 올랐다.


서영은  여느 때처럼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 수업 도중 우연히 아빠 얘기가 나왔는데

도연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씨라며 아빠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부를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으나 계속되는 거북스러운 호칭에 서영이 화제를 바꿨다.


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 중 2 학생

단순히 사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예의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도연은 처음 만날 때부터 참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다.


북한이 남침하지 않는 이유는 남한의 중2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중2의 존재란 가볍지 않은 법인데


도연은 그러한 중2학생 치고는

정말 예의가 바른 학생이었다.

평소에 엄마와 여동생을 대하는 태도와 말투를 보더라도 전형적인 착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영어수업이 끝나면 방 문도 직접 열어주는 도연이었다.

수업 후 엄마 심부름을 갈 일이 있어 같이 집 밖에 나왔는데 만나는 이웃들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도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예의 바른 학생이 유독 아빠 얘기만 나오면 예민하고 예의가 없다.

아무리 아빠가 싫다고 해도 **씨라고 부르는 건 정말이지 서영에게는 거슬렸다.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않고 **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중2 아들

성악설을 믿는 서영은 조금은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범한 한 가족이 서영의 인생에 들어왔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서영에게

그 가족은

늘 어디서나 만날 법 한 그런 평범한 가족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극히 평범한 듯 보이는 그 가족에게서

조금씩 삐져나온 가시가 보이는 듯했다.

그 가시는 작지만 많이 날카로워 멀리 떨어져 있는 서영에게까지 느껴졌다.


그 가시가 박힌 채

그대로 살아가던지

함께 힘껏

깊숙이 박힌 가시를 뽑아내던지


그건 그들의 몫이다.


그렇게 30분이 지나 논현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며

서영은 도연에 대한 모든 생각을 멈췄다.


이제 서영은 새롭게 시작하는 대학원 수업의 Reading List를 보며 계획을 짜야한다.


다시 공부하는 학생이 된 서영은 그저 기쁘고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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