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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당일 여행 가기 좋은 곳, 운보의 집

by 책방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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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웃의 소개를 기억해 두고 있었다. 몇 시간이면 고스란히 지워지는 게 당연한데 청주 운보의 집은 어쩐 일로 잊히질 않고 아른거렸다.


한동안 짬이 좀 나겠다 싶으면 나의 옛 기억들도 얼기설기 남은 청주를 어김없이 떠올렸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훌쩍 다녀올까 하길 몇 차례였다. 소주에 무려 광천수를 섞어서 마시던 곳. 청주공항 발 제주로 떠나기 전 식사를 위해 둘러보던 말끔한 얼굴을 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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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집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길 92-41




어느 날 오후 한 시간 남짓 예상하고 길을 나섰으나 어김없이 길은 더 막히고 3~40분 정도 늦어졌다. 북서 방향은 먹구름이, 남동 방향은 파란 하늘이 드문 보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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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어딜 나서면 이것저것 탓을 많이 하게 된다. 하필이면 날씨가, 이 길에 공사를, 문닫는 날, 가는 날이 장날, 왜 이런 사람이 여기... 일상을 다른 공간으로 옮긴다는 마인드가 그래서 유리하다. 짐도 없이 차림도 대충 하고 나선 길, 이도저도 안되면 그냥 걷거나 차 마시고 오지 뭐,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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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이 말년을 보낸 곳, 운보의 집을 찾았다. 입구 안내문엔 오늘도 비문이 섞여 있다. 이런 허술한 안내문을 걸어둔 문화재나 시설이 너무 많다. 눈에 쌍심지 켜고 찾는 게 아니라 가시처럼 따끔하게 걸려드는 걸 어쩌나. 문장 점검 한번 받는 게 뭐가 어렵다고... 안내문도, 이런 무용한 감각을 버리지 못하는 나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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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 머금은 마당이 운치를 더하는 운보의 집. 오늘 나서길 잘했구나 싶다.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새로 열어 보이는 풍경은 움직임 없이 맑게 정지해 있다. 나도 잠시 멈춰가기 좋겠다.


텍스트가 사고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하는 것처럼 공간이 만들어 주는 삶의 범위가 있을 것이다. 이런 평온한 가옥에서 보낸 김기창 화백의 일상은 어땠을까. 나라면 무엇으로 이곳을 채우거나 비우며 소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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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이름을 빌어 그런 건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작품 같다. 마당, 정원, 서재, 거실, 침실 등 각각 분리된 공간이 주는 가치가 있다. 현대 도시생활에서는 공원, 서점, 카페, 호텔 등이 공유의 형태로 이를 대체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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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 구석 반 평도 안되는 철장 구조 안에 나를 반기며 좋아하는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다. 굳이 이 아름다운 곳에 외로운 생명 하나를 통제 방식으로 방치하는 모순의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그래도 잘 먹이고 가끔 풀어 놀게 해주려나. 한번 쓰다듬어주고 떠날 수밖에 없는 여행자의 희망 섞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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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문으로 올라가면 바로 운보미술관이 나온다. 김기창 화백과 역시 화백인 부인 우향의 작품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운보의 집은 부인과 사별 후 지어 혼자 거주했다고 하니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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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야외 조각공원이 보여 그곳까지 거닐어 본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화백의 생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내가 보는 풍경도 오늘이 마지막으로 내일부터는 또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고, 당연하게도 거기에 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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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허무함은 이 순간의 성찰로 다스린다. 잠시동안의 성취에 젖은 인간보다 몇 갑절 많은 이가 상실의 고통을 견딘다. 그리고 모두에게 다르지 않은 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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