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민박집을 나선 후 월정사로 향했다. 주차를 마치고, 기억이 묻어 있는 곳이 있는지 여기저기 살피며 월정사 입구를 걸었다. '그때 그곳이 지금 이곳이 맞긴 한가.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맞는가.' 이것은 잡다한 지식 기반의 분석보다는 의미 부여의 문제다. 그저 이 시간이 반가웠다.
먼저 사찰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람이 규칙을 만들고 기복으로 허탈하게 귀결하고 마는 현대 종교의 레토릭에는 여전히 관심이 가지 않는다. 아니, 희한하게도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고 해야 할까. 다만 역사·문화적 탐구, 자기 성찰 등의 관점에서 종교는 여전히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흥미로운 대상이다. 오늘은 그저 오래된 추억을 더듬고 휴식을 건네는 마음으로 가볍게 구석구석을 거닐었다.
하늘이 움직이는 것인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인가, 이 땅의 자전 속도를 내 감각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가 하는 헛된 공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 공양 시간이었다. 공양실을 멋쩍게 기웃거리다 용기 내어 한 접시 덜어 먹기로 했다.
수양 중 공복을 달래며 마음에 점 하나 찍듯 한다는 점심(點心) 공양에, 나는 바위만 한 점을 찍고 말았다. '얼마만인지도 모를 절밥은 여전히 이렇게 맛이 좋구나!' 감탄을 내뱉는 쑥스러움을 담아 나오는 길, 시주함에 돈을 좀 넣었다. 문득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라는 책이 생각난다. 공양실 안에서는 성가신 관광객으로 취급하며 배식하는 분도 있고, 푼돈 넣는 머쓱한 손에 석가모니보다 환한 미소로 감사 인사를 건네며 배웅하는 분도 있다. 월정사 공양실 안에서도 각자의 성격과 철학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는 다채로운 세계가 숨 쉬고 있다.
공양실을 나와 계곡 방향으로 걸어가니, '청류다원'이라는 분위기 좋은 전통 찻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와 유기농 빵, 찻잔 등을 판매하는 공간을 지나 야외로 다시 나가니, 계곡을 바라보는 나무 데크가 나온다. 이 데크는 찻집 바로 옆 '난다나'라는 카페와 차분하고 널찍하게 공유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는 잠시 쉬어가야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나름 대비한다고 책 한 권을 챙겨 왔으니, 이미 저서 중 네 권을 읽은 김영민 교수의 신간 <가벼운 고백>을 펼쳐 읽었다. 평소 휘릭 메모해 두었을 법한 단문들을 합쳐 놓은 듯한 산문집이자 잠언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었다.
서양미술사의 지식을 가지고 유럽 여행을 하는 것과 아무런 지식 없이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고, 인생이라는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배움을 벗하여 인생을 통과하는 일은 다르다고, 그런데 여행이란 시작이 있었으니 결국 언젠가는 끝나게 된다고, 가벼운 고백 - 김영민
절 밖으로 내려오니 어제 걸었던 선재길의 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전나무숲이 바로 오늘의 산책길이다.
젊은 날의 내가 사랑했던 길, 월정사 전나무숲길로 들어섰다. 말없이 그저 바라보고, 만져보고, 걸었다. 오가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럴 정도로 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 나도 신발을 벗어 들고 축축함이 남아 있는 흙을 맨발로 밟았다.
600년을 버티어내다 쓰러진 거목이 눈에 들어온다. 죽으면 그저 사라지는 생명은 없다. 이 죽은 나무의 밑동을 따라 새 생명이 돋아나 자라고 있다. 누군가의 소멸과 누군가의 생장이 한 묶음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 또한 다른 생명의 죽음을 양분 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잔혹한 진실 속에서 미안함을 품는 것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파괴력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길일 터였다.
맨발 걷기로 숲길을 왕복하고 나면 발을 씻을 수 있는 공간을 만난다.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설이다. 다행히 염치없이 발을 박박 문질러 씻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흙만 씻어낸 후, 돌 위에 발을 올리고 말리는 동안 책의 나머지를 읽으며 '놀았다'. 그때 문득 '이것은 '놀이'보다는 '놀음'이 더 어울리는 기분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놀다'의 명사형은 원래 '놀음'만 있었고, 사행성 놀음과 구분하기 위해 '놀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충만한 정서를 안고 전나무숲길을 나서는 길, 그제야 "어디로 갈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대책 없는 여행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던 날이다.
동해안으로 가자고 정하고, 떠나기 전 어제와는 다른 찐빵집에서 간식을 포장했다. '신선희 황기찐빵'은 월정사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20년 된 찐빵집이다.
찐빵도 찐빵이지만, 어제는 품절되어 먹지 못했던 감자떡이 울컥, 가슴을 건드리며 끝없이 꿀꺽 넘어간다. 글을 쓰거나 쉬고 싶을 때 혼자라도 다시 올 만한 곳이구나 싶다.
월정사 근처에는 밥 먹을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메뉴가 나물밥으로 단조롭고 일찍 문을 닫는다. 저녁에 출출할 경우 편의점 외에는 대책이 없으니, 미리 간식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이제 월정사만큼이나 오랜만에 찾는 정동진으로 출발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