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그 숲길을 다시 걷다
걷는다는 건 단순히 목적을 위한 이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책'은 손발을 닿으며 바라보고, 기울여 듣고, 숨쉬고 냄새 맡으며 내가 딛고 선 세계와 나누는 대화의 방식 중 하나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사랑하던 월정사 전나무숲길의 봄날 같던 기억을 그만 덮어두고 있었다.
발왕산을 내려와 늦은 점심을 어렵게 해결했다. 문을 연 곳이 없어 별 특징이나 감동 없는 막국수로 아쉬운 한 끼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여행이지 어쩌겠나.
오대산삼거리 황기찐빵에서 점심의 아쉬움을 달랠 찐빵을 사고 숙소로 향했다. 재료나 방식의 차이가 각 집마다 있겠지만, 이곳 찐빵은 유독 외관이 팽팽한 것이 특징이었다. 템플스테이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월정사 바로 앞,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민박 방에 짐을 풀었다. 단돈 6만원의 즉흥 일정이었지만, 특급 호텔이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은 날이 바로 이런 날일 터다. 오랜만에 만난 단맛 덜한 강원도 찐빵을 한입씩 먹으며 잠시 쉬었다. 아쉽지만 이번에 횡성 안흥찐빵마을은 들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선재길을 잠시 걷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일 월정사와 전나무숲길을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선재길은 상원사 앞에서 월정사까지 이어진 완만하면서도 정겨운 숲길이다. 월정사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상원사 종점에서 내려 월정사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 서너 시간 동안 선선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를 가지고 올라가 중간쯤 적당한 곳에서 잠시 거닐다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차가 다니는 길을 따라 상원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군데군데 계곡을 건너 숲길로 들어서는 작은 다리들이 나타난다. 이런 길의 입구에서는 젖어오는 흥분에 리듬도 없이 마음이 흔들리곤 했었다. 오늘도 매한가지였지만,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의 신분임을 상기하며 감상에서 깨어났다. 목표를 찍는 일도, 도달의 인증샷을 남기는 것도 내게는 무의미하다. 특히 이런 숲길이라면 그저 조심스레 들어가 자연에 안기면 그뿐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숲을 바라보고 앉도록 마련해 둔 명상 쉼터도 만날 수 있었다. 천천히 숲 향기와 함께 걸으며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치스러운 명상이라서, 굳이 자리에 앉아보지는 않았다.
우리를 반기는 건가 착각을 부르며 울던 새가 훌쩍 떠나자, 나뭇가지는 새가 머문 흔적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출렁인다. 마치 존재 간의 충돌과 헤어짐으로 남게 된 사랑이나 고통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을 여러 빛깔로 흔들어 대는 것과 비슷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노쇠해질지 이보다 더 회복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좋은 날, 오늘보다는 더 길게 이 숲길을 온전히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체력에 따라 코스를 잘게 나눌 수 있는 다리가 곳곳에 있고, 거기에 맞춰 정차하는 버스도 있어 더욱 매력적인 선재길이었다. 어둑해지는 하늘과 이 숲의 고요만큼이나 깊게 새겨진 산책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