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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여행 ① 장모님 시골밥상, 영주 풍기읍 맛집

by 책방삼촌


부석사 가는 길 경북 영주 풍기 맛집 '장모님 시골밥상'



여행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할까. 여행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트램이 섰다. 문이 열렸다. 정거장도 아닌데.

아무도 내리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저 동네 아줌마들과 차장의 수다만 타고, 내린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여행' 중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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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벗어난 삶에서 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줄어든 갈등과 지속되는 평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에 부합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린 안다. 어쩌면 여행을 떠났든 그렇지 않든 나는 늘 여행자의 신분이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그 마음을 보기 위해 이번엔 여태 가본 적 없는 경북 영주로 떠났다. 2024년, 아직 가을이었다.


쉬엄쉬엄 달려 영주 풍기읍에 도착했다. 아침을 간단히 한 이유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부석사와 소수서원 가는 길, 풍기읍에서 식사를 하는 게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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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에 관심이 별로 없어 들어가 보진 않은 풍기 인삼시장이다. 풍기역 바로 앞에 있다.


풍기 인삼시장 건너편, 가보려고 시도한 맛집엔 대기만 20팀이 넘는다.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식당이 몇 더 있어 기웃거렸는데 한창 점심시간이라 만만치 않다. 그중 기다릴 만큼 적당한 줄을 서 있는 '장모님 시골밥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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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이 된 이 맛집 후보 앞에서 15분가량 기다리는 동안 뒤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걸어오신다. 몇 군데 근처 풍기 맛집 정보도 주셨는데 결국 들러보진 못했다. 선택과 만남의 예측 불가능성도 우리 삶의 본질인데 여행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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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을 보면서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찬과 밥이 잔뜩 차려진다. "아, 저..." 해봐도 주문을 받지 않는다. 내가 먹을 밥은 식당 앞에 줄을 서는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10,000원의 시골밥상.


너무나 분주하고 활기찬 식당. 이 예측 밖 역동성에서 행복을 찾아낸다. 장모님 시골밥상의 점심상 앞에서는 시장기, 가진 것, 나이와 신분에 무관하게 모든 손님이 평등하다. 그냥 착석과 동시에 차려지는 밥을 먹고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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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각만큼은 너그럽지 않은 동반자의 입에서 바로 "와, 맛있다!" 소리가 나온다. 변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만나면서 터지는 탄성은 오늘의 운명이 된다.


이 평범해 보이는 음식들이 모두 최상급이다. 김 한 장, 갈치젓, 오이 한 조각이 다 따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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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잘 지어진 쌀밥이 워낙 훌륭한데 분위기로 봐선 눈대중으로 밥을 할 것 같단 것이 흥분을 자아낸다. 오이를 슬쩍 무쳐낸 된장이 대체 어디 출신일까. 직접 담근 된장으로 추정한다.


바글바글 끓던 된장찌개의 기포가 가라앉고 나니 실체가 드러난다. 꽃게를 비롯한 재료가 충실하고 역시 맛은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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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정보를 찾아보다 궁금해졌는데, 내륙 중의 내륙인 영주에 신선한 해산물을 다루는 가게가 많고 인심도 푸짐한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내일 또 와도 만족스러울 풍기읍의 맛집을 찾은 것으로 이번 여행의 수준과 흥분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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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나오며 영주 사과 파는 분들을 만났다. 소백산 자락에서 키운 영주 사과는 꽤 유명하다. 집 냉장고에 넣어둔 사과 때문에 살 생각은 없었으나 할머니의 부담 없이 수더분한 화술을 외면하는 건 이미 불가능한 도파민 과다 상태였다. 그런 것치곤 놀라운 절제력으로 양을 줄여 받아든 낙과 만 원어치. 할머니가 툭 넣은 덤 두 개가 봉투 속으로 들어온다. 맛까지 기대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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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흥분을 다소 가라앉히고 골목 안 풍경을 찍으며 짧은 영주 여행의 시작을 조용히 맞이한다. 그리고 부석사로 가던 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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