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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ice Sep 10. 2019

에필로그

시작부터 나는 네 명의 엄마였다.

비행기 선반 위 캐리어를 꺼낼 때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한 번에 답하고 마무리되는 적이 없다. 첫 물음에 답이 없어 닫고 올렸다가 누군가 달라고 하면 다시 내려서 열고 또 누가 춥다고 하면 다시 내려서 꺼내고 올리고 이렇게 적어도 네다섯 번은 기본이다.


뭔가를 4명에게 동시에 설명할 때 엄마와 이모의 호칭을 구분하는 대신 일부러 “엄마는~”이라는 호칭을 쓰며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했다. 여정 동안에 나는 이모가 아닌 엄마였다.


물론 아이들은 내 마음가짐과는 달랐다.

핫케익을 최선을 다해 구워 주면,

“한국 가서 엄마한테 내가 핫케이크 구워줘야지”

자기 전에 누워서 한참 웃으면서 이야기기 하다가도 문득,

“한국 가자 마자 엄마 꼭 안고 싶다.”

어른이 한 명이라 빠듯하게 담아 온 캐리어의 셀프 체크인에서 무게가 오버되는 바람에 한참 캐리어 세 개를 바닥에 동시에 열어 놓고 혼자서 이것저것 옮기느라 정신없는데

“이래서 우리 엄마는 빈 캐리어 하나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구나”


“전 패스트푸드 안 먹어요”

“이 중에 제가 먹을 건 없어요”

“전 빵 안 먹을래요.”

입이 짧은 아이들이라 고를 수 있는 선택지에서 최선을 다해 다양하게 골라도 항상 맘에 드는 한두 가지 메뉴만 집중 공략하느라 나머지 메뉴들은 소외되었다. 안 먹는 데 대한 서운함보다 배가 안찰 텐데 싶은 마음에 잔반 처리를 하는 중에도 더 시켜야 하는지 계속 물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입에 안 맞아서 아예 보이콧하는 게 제일 큰 마음의 짐이었다. 어떻게든 먹어야 컨디션을 유지하고 아프지 않게 즐겁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메뉴 선정에 고심이었다. 그래도 여행 초반보다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현지 음식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아이들의 적응력은 어른보다 빠르구나 싶었다.


"엄마 거 챙겨 왔어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주머니에 든 걸 열어 보이는 딸.

주머니 가득 후추와 소금이다. 코스트코에서 핫도그를 사면서 셀프코너에서 챙겨 온 모양이다.

코스트코 출신 소금 후추 (스테이크 구울때 요긴하게 씀^^), 혹시 필요할 지 모른다는 혼잣말과 함께 비닐 챙기고 있는 아들
비행기에서 받아서 스쿨백으로 활용된 천가방 백팩, 여정 내내 트렁크에 실고 다닌 코스트코 생수 2박스도 알뜰히 다 마셨다.

한국에서 모든 게 충족한 생활을 해오던 아이들에게 충족하지 않은 삶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여행 기간 동안은 최대한 아끼고 덜 쓰면서 경제관념을 심어주고 싶었고 주어진 여건, 주어진 생필품을 최대한 활용하며 즐기는 방법을 찾길 바랬다. 용돈이 20달러라 사고 싶은 걸 못 산다고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면 내심 용돈을 더 쥐어주고 싶고 대신 사주고 싶어 마음이 흔들렸지만 정말 필요한 건 한 박자 쉬었다가 슬쩍 공용 물품인 듯 구매했고 꼭 사야 하는 건 몰래 가서 대신 사주고 서로의 비밀로 하는 등 우리의 규율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알아서 판단하고 해결하도록, 스스로의 고민과 결정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고민의 순간마다 몇 번씩 지갑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던 아이들은 여정이 끝날 무렵 깔끔히 다 쓴 아이도, 아끼다가 다 못쓰고 한국으로 가져온 아이도 있다. 매 순간 깊은 고민이 있었기에 어떤 선택에도 후회는 없어 보인다.


Sweet Job!

수영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꼬맹이 아들에게 건네는 엄마의 하이파이브였다.

Good Job은 알고 있지만 Sweet 이 들어가니 뭔가 바라보고 있는데도 마음이 따듯해왔다. 우리나라에선 수영 수업 끝나고 줄지어 나오는 아이들 틈에 낀 내 아이에게

"어머 너 오늘 정말 잘하더라. 너무 잘했어. 최고야"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이파이브를 외치면 아마도 오버하는 엄마로 주변의 많은 시선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냥 시크하고 쿨하게 "잘했어. 얼른 씻고 나와." 이 정도가 우리식 표현이 아닐까... 어쩌면 잘했다는 표현도 아이가 묻지 않는 한 먼저 꺼내기 민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칭찬에 인색하게 살아온 듯하다. 내 자식을 칭찬하는 게 마치 경쟁사회에서 그 자리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 계속 더 높이, 더 멀리 달리게 만려면 칭찬보다는 격려, 그보다는 채찍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 5년, 10년, 아니 평생도 살고 싶어요."

한국 귀국을 위해 다시 찾은 밴쿠버 공항에서 출국장을 향한 다리 위를 걸으며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진심 다행이다.

영어가 얼마나 늘었는지... 그래서 학원에 돌아가면 월반을 할 수 있는지... 학교에서 배운건 잘 익혔는지... 그런 건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영어와 공부 보다도 더 소중한 건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선과 뜨겁게 살아갈 에너지이다. 캐나다에서 살아온 보름이라는 시간이 아이들에게 즐겁고 재밌는 경험이 되고 유년시절 추억 속에 소중히 자리 잡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등 뒤로 아이들의 따듯한 감회가 들려오자 공항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고 경쾌해졌다.



경쟁에서 잠시 숨 고르기


방학이 끝나가자 관두거나 쉬기로 했던 학원들에서 서서히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신나게 놀았으니 다시 여행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야지... 논만큼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캐나다에서의 보름은 온전히 아이들에 맞춰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보름 동안 내가 달라졌다.


학교 끝나자마자 가방 바꿔서 셔틀버스 타고 학원 가서 3시간 공부하고 나오자마자 차 안에서 간단히 저녁 먹고 다시 학원 가서 9시에 와서 씻고 숙제해야 하는 일상...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자기 키의 반만 한 학원 가방을 등에 업고 멍하니 서 있는 우리네 아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레벨이 뭔지, 선행을 어디까지 나갔는지... 너무나도 중요하던 일들이 여행을 다녀오고 난 후에는 정말 사소하게 느껴졌다. 내 시야가 한참이나 좁았구나. 세상은 이렇게 넓고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은 무궁무진한데...  아이들을 내 생각과 결정대로 몰아붙일 게 아니라 그들의 소중한 "오늘"을 지켜주고 싶다.


Format and Restart!


일정표의 모든 일정을 지웠다. 아이들에게 매달 학원비로 지출되던 금액의 일정 비용을 직접 주고 그 안에서 다니고 싶은 학원을 정하라고 했다. 넣고 싶은 대로 넣었다가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걸 보더니 놀라는 눈치다. 당연하게 다녔던 학원이 이렇게 비쌌나 싶기도 한 듯...

대신 아낀 비용만큼 통장에 모아서 12월까지 각자 200만 원이 모이면 겨울방학에 오세아니아로 여행 가기로 약속했다. 물론 여행지와 기간은 아이들이 결정할 거고 금액에 따른 예산도 아이들이 정하는 걸로!


9월부터 시작해서 이제 일주일 지났는데... 등 떠미는 일정 없이  집에만 있어서 아이들은 신이 났다. 불안함은 온전히 엄마 몫이다. 엄마는 오늘도 몰래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 하다가 관두면 당장 갈 곳이 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다시 앉는 맘 고르기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다.


그래도 좋은 건,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먹고 싶어 하는 간식도 해줄 수 있고,

저녁식사도 같이 요리하고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참으로 사소한 일들이지만 엄마는 그 사소함이 간절했나 보다.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책상으로 몰아가려고 소리 지르고 구박하겠지만

여행이 있어 늘 새로운 시선과 용기, 도전이 가능하다는 것!


캐나다 보름살이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성장했지만 나 역시도 한 뼘 성장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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