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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구루 Sep 20. 2022

아홉 살의 크리스마스 여행

Part2. 여행자의 시간 I : 겨울에 떠나는 미국 서부 로드 트립

 


라스베가스로 떠나오기 전 서부 쪽은 사막 지대라 겨울이라도 날이 뜨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캘리포니아와는 차원이 다른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적당히 반팔과 긴팔을 섞어 짐을 꾸려오긴 했지만 완전히 두꺼운 겨울 외투는 챙기지 않았던 터라 급히 아울렛에서 방한용 외투를 사 입었다. 사람 셋, 개 두 마리까지 다섯 개의 외투를 든든하게 챙겨 입고 오늘의 목적지인 자이언 캐년으로 향했다.

 


아주 유명한 캐년은 아니었지만 라스베가스를 떠나 다음의 메인 행선지인 브라이스 캐년까지 가는 동안 중간 동선에 위치해 있어 사막의 대자연을 둘러보기에 좋은 코스였다. 자이언 캐년에는 아주 커다란 바위들이 가득했다. 아이는 밤이 되면 바위들이 일어나 숲 속을 걸어 다닐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마치 바위들이 입을 꾹 다물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이언 캐년의 트래킹 코스는 경사가 없는 완만한 길이어서 다른 트래킹 코스에 비해 걷기가 좋았다. 그런데 어젯밤의 데자뷔처럼 트래킹 중 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고 새로 산 옷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걱정됐지만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지는 고요한 숲 속을 걷는 것이 좋았다.



한 시간 반의 트레킹을 마칠 즈음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친 뒤 말갛게 씻긴 오렌지 빛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갈 때는 너무 어두워져서 새로 이동할 숙소를 찾는데 애를 먹어야 했지만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새로 이동한 숙소는 외딴곳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오두막이었다. 에어비앤비 숙소의 주인인 Kenny 아저씨는 우리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집에 살고 계셨는데 다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사는 곳은 이곳과 어떻게 다른지 15분이 넘는 호구 조사 끝에야 겨우 숙소를 둘러볼 수 있었다.


 

숙소는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외딴곳에 위치해 있어서 낯선 공간이 처음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흙먼지 가득한 사막에서 트래킹을 하고 비까지 맞았던 터라 차갑고 낯선 공기 속에서 짐을 풀고 샤워를 해야 했는데 씻고 나오자 신기하게도 낯설었던 공간이 한결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에버비앤비 숙소에는 다행히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지난 3일간 쌓인 빨랫감도 깨끗이 세탁할 수 있었다. 피곤했는지 아이는 샤워를 마치고 일기를 쓰자마자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여서 남편은 산타 할아버지로 빙의해 아이에게 줄 카드를 썼다. 서부 로드 트립을 오기 전 라스베가스에서 묵게 될 숙소로 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노키아 핸드폰을 미리 주문해 두었었는데 드디어 개봉할 때가 온 것이었다. 아이의 머리맡에 핸드폰과 카드를 올려 두고 바로 옆에 위치한 주인아저씨의 집으로 건조가 끝난 빨랫감을 찾아온 후에야 침대 위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빨랫감을 가지고 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께 받은 노키아 핸드폰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했다. 비록 유심칩은 없지만 Wifi 가 가능한 곳에서 한국에 있는 그리운 친구들에게 카톡을 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엔 충분할 것이었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핸드폰을 가지게 되어 신이 난 아홉 살과 오늘의 여정을 위해 부지런을 떨어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레드락 캐니언. 지난밤 눈까지 내려 발이 푹푹 패이는 레드락 캐니언은 너무 춥고 가파라서 얼른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는 힘이 들지도 않은지 눈 덮인 산 이곳저곳을 토끼처럼 뛰어다녔다.

 


레드락 캐니언을 거쳐 도착한 브라이스 캐년은 입이 벌어질 만큼 장엄한 풍경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아찔할 정도의 장엄함 속에서 어떤 미국 청년은 사진을 찍겠다고 벼랑 끝까지 발을 딛고 었다. 나 모습보는 것조차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아버렸는데 캐년 곳곳에는 인생사진을 찍으려고 가파른 절벽 위에 아슬하게 몸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나는 자연 그대로의 장엄한 풍경에 압도당해 사진을 찍는 것고 잊고 한참을 눈 덮인 캐년 앞에 서 있었다. 이  마주한 브라이스 년의 압도적인 장면은  후로도 오랫동안 생각날 정도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방문했던 그랜드 캐년 보다도 브라이스 캐년의 풍경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뾰족뾰족 송곳니 같은 모양을  기이한 바위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풍경이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광활한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연이 만들어낸 멋진 장관을 가슴에 담기 위해  덮인 브라이스 캐년한참을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여행을 시작한 5 , 미국에 온지는 열흘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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