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여행자의 시간 I : 겨울에 떠나는 미국 서부 로드 트립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짐을 꾸려 숙소를 나서는데 고작 몇 걸음 앞에 있는 차까지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져 차가운 눈이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쌓인 눈 위로 바퀴를 굴리는 게 걱정됐지만 갈 길이 멀었기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바퀴를 굴려보았다. 다행히 도로에는 제살 작업이 완료되어 있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에 무리는 없어 보였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2시간 30분을 달려 유타주에서 애리조나주로 넘어왔다.
오늘의 목적지는 그랜 캐년 댐과 호스슈 밴드. 비가 잘 오지 않는 사막에 마실 물과 농작물에 공급할 물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만든 거대한 댐이 이제는 이곳에 오면 꼭 들려야 할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 시설에 아이도 나도 눈에 휘둥그레져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호스슈 밴드는 콜로라도 강 주변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아치 형태의 사암 절벽으로 그 모양이 꼭 말발굽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실제로 보니 말발굽과 꼭 닮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책에서 사진으로 보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었다. 일부 구간은 펜스가 쳐져 있었지만 대부분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만큼 곧바로 낭떠러지와 연결되어 있어 장엄한 풍경이 더 아찔하게 느껴졌다.
브라이스 캐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은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꽤 높고 가파른 곳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겁쟁이인 나는 아찔한 절벽 위 목숨을 건 촬영은 하고 싶지 않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바위 위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사진을 찍었다. 호스슈 밴드의 압도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 다 되어서야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오늘 묵게 될 숙소는 미국 인디언 소수민족 나바호족의 전통집 호간이었다. 이번 서부 로드 트립을 계획한 남편이 미국에 오기 전부터 아주 특별한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며 기대감을 가득 심어놓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마주한 호간은 지붕과 간이침대만 있는 막사 같은 공간에 불과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대지, 전기도, wifi도, 샤워 시설조차 없는 곳. 화장실을 가려면 칠흑 같은 어둠 속 핸드폰 조명에 의지한 채 100m를 걸어야 하는 곳, 화장실은 물론 푸세식이었다.
몽골의 게르와 비슷한 모습을 한 호간의 문을 처음 열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덩그러니 놓인 간이침대 3개와 장작을 태우는 방식의 난로 하나, 그리고 약수를 담을 때 보았을 법한 커다란 물통 하나가 전부였다. 오늘 하루 호간에 묵으며 우리가 손을 씻거나 양치를 할 때 사용할 물이었다. 이런 곳에서 하루를 자야 하다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상해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무척 신나 보였다. 호간 바닥엔 고운 입자의 붉은색 흙이 가득 깔려 있었는데 아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구해와 호간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고운 흙을 만지기도 하며 놀았다. 그러다 천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엄마 여기 너무 좋아! 이거 봐! 흙도 있어. 이 흙 좀 만져봐. 엄청 부드러워. 우리 여기에 그림 그리고 놀자!”
내 생각엔 그야말로 지붕만 있을 뿐 야외에서 하는 노숙과 다름없어 보이는 빵점자리 숙소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에겐 이곳이 백점 자리 숙소였다. 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붉은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다 다리가 저려 밖으로 나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 사방이 캄캄한 넓은 하늘에서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Kenny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본 것보다 10배는 더 많아 보이는 별들이었다. 넋을 놓고 하늘을 보고 있는데 호스트인 Richardson이 호간과 나바호족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시작할 거라며 중앙의 터로 나와보라고 했다. 호간에 묵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우리 외에 오늘 호간에 묵게 될 인도 커플이 캠프 파이어 앞에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광활한 대지에 우리 외에 두 사람이 더 묵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를 안도감과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Richardson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나바호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호간을 만들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호간을 체험하고 나바호족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에어비앤비로 오픈했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지키고 싶어 하는 간절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의 스토리텔링에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며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스토리텔링이 끝나고 호간으로 돌아오니 밤이 되어 더 내려간 기온에 몸이 떨릴 만큼의 추위가 느껴졌다. Richardson 이 마당에 미리 준비해둔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 불을 지폈다. 나무가 타기 시작하자 차갑게만 느껴지던 호간에 금방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미리 준비한 침낭을 펴 몸을 누이고 길고 긴 밤을 보냈다. 나무가 다 타들어가 불이 꺼지면 금세 냉기가 돌아 너무 추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남편은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밤새 도록 부지런히 장작을 태웠다. 초코와 마음이도 추웠는지 좁은 간이침대 위로 올라와 내 다리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서야 잠이 들었다.
긴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뜨니 Richardson 이 준비한 나바호족 전통 티와 수프가 야외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었다. Richardson의 개 Attic 도 그를 따라왔는데 덩치는 산만했지만 얼마나 온순하고 상냥한지 마음이와 초코에게도 한 번 짖지를 않고 가만히 곁에 서 있기만 했다. 서연이는 온순한 Attic과 드넓은 들판 위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경험들.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또다시 호간에서의 하룻밤을 선택할 일은 없겠지만 언젠가 한국에서의 삶이 권태로워질 때쯤이면 지난밤 장작불 앞에서 Richardson이 했던 말이 떠오를 것 같았다.
“When you’re tired,
you should listen
to the quietness of n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