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생활자의 일상 : 꿈꾸던 일상 속에서
주변 지인 대부분 미국에 사는 먼 친척이나 친구 한 명쯤은 꼭 있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미국에 사는 지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남편의 석사과정을 위해 미국에 왔다고 하면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 우리에게 “여기 사는 친척이나 가족이 있으신 거예요?” 하고 묻곤 했다. LA를 넘어 미국에 사는 지인이 한 명도 없다고 하면 어떻게 팔로스 버디스라는 곳을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떠나올 수 있었는지 묻곤 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우리는 혈혈단신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왔다.
미국에 온 당일 이케아에서 고른 매트리스를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두고 침대에 머리를 누였을 때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미국에 온 첫날 우리 집이라고 부르기엔 낯설고 차갑게 느껴지던 공간은 자꾸만 생각을 많아지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아파트 안에서는 마주치는 이웃조차 없어 이 큰 단지에 우리만 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집 앞에 위치한 수영장, 놀이터 모두 이상하리 만치 조용해서 이 아파트에 다른 이웃이 살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미국에 도착한 12월 말은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개학 전 겨울 방학의 막바지에 있던 때라 대부분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도 미국에 도착한지 4일 만에 라스베가스를 시작으로 서부 로드 트립을 다녀왔고, 열흘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집 앞 곳곳에서 자연스레 많은 이웃을 만날 수 있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생활이 시작되었을 땐 개들과 산책을 하며 또 아이의 또래 친구들을 알아가며 자연스럽게 곳곳에서 이웃들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국에서 생활한지 5개월쯤 되었을 때 나의 핸드폰엔 미국에서 사귄 친구의 번호가 30개도 넘게 저장되어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마주하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이웃 혹은 친구라 부를 수 있을만한 관계가 제로에서 서른 개가 넘도록 생긴 것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가면서 정서적으로도 많은 부분이 안정되어갔다. 처음 미국에 올 때 남편은 학생비자라고 불리는 F1 비자, 아이와 나는 동반 가족에게 부여되는 F2 비자를 발급받아 왔는데 F2 비자는 공부도, 경제 활동도 할 수 없는 흔히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시체 비자라고 부르는 것이었기에 남편은 미국에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우울해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개를 키우고, 아이가 있고, 어덜트 스쿨로 매일 차를 끌고 밖으로 나가야 했던 나는 어쩌면 친구를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다 보면 우리와 같이 개를 키우는 다른 반려인들과 “얘는 몇 살이에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무슨 종이예요?” 하는 것들을 묻고 답하며 자연스레 통성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탈리도 그렇게 만나게 된 친구 중 하나였다. 나탈리는 우리의 둘째 강아지 마음이와 나이도, 크기도 꼭 닮은 알로라는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마음이를 산책시키기 위해 집 앞 공원을 찾을 때마다 알로를 산책시키러 나온 나탈리와 우연히 마주칠 때가 많았다.
알로와 마음이는 신기하리 만치 잘 어울리며 서로를 좋아했고, 나탈리와 나 역시 대화가 잘 통했다. 나탈리는 처음 미국에 온 내게 인근의 한인마트, 아파트 시설 이용법 등을 알려주며 늘 내게 무엇 하나라도 더 도움을 주려했다. 끝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 하기에 이르렀고, 나탈리 또는 우리 가족 양쪽 중 한쪽이 여행을 떠날 때는 서로의 개를 돌봐주며 완벽한 파트너십을 자랑했다. 언젠가부터는 일부러 산책시간을 맞춰 이틀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할 만큼 가까워졌다. 어느새 나의 미국 생활에 나탈리라는 이름은 빼놓을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대하고, 진심으로 친절을 베푸는 나탈리 덕분에 미국 생활 초반 어디에도 물어볼 수 없었던 많은 에러 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고 외롭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이를 통해서도 소중한 인연들을 맺을 수 있었다. 아파트 내에서도 우리집은 수영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보니 방과 후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수영장에 놀러 나오면 친구가 고픈 서연이도 항상 나가 놀기를 원했다. 한국에서는 열 살쯤 되면 집 앞 놀이터 정도는 혼자 나가 노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에서는 만 12세까지의 아이는 어디를 가나 부모 동행이 필수였다. 아무리 발코니에서 바로 아이를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이라 해도 반드시 부모가 동행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서연이가 친구와 놀고 싶어 하면 나도 함께 나가 아이의 놀이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다. 결국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따라 나온 다른 부모들과 서로의 이름을 묻고, 인사를 하며 통성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캐시, 제니퍼, 리아나, 올가, 크리스틴, 샌디와 같은 친구들 모두 같은 아이의 엄마로, 이웃으로 인연을 맺게 된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아이들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학교 수업을 마치면 가방을 벗어던지고 수영장에 나와 놀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치며
우리는 이웃에서 친구가 되어갔다.
사실 처음에는 매일 마주쳐야 하는 이웃들과 영어로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머릿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으로는 잘 나오지 않았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진땀이 날 때가 많았다. 빠르게 말하는 네이티브의 영어를 알아듣기 힘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방인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친구로 관계가 변해가며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대화가 편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영어에 특별한 발전과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과 언어 수준은 동일했지만 변화된 관계 속에서 더 이상 긴장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이따금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있었고 영어로 말을 할 때 실수도 많지만 친구들은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내게 눈을 맞히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함께 비운 와인이 몇 병이었을까? 미국에 온 후 세 달쯤 된 뒤부터는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매주 금요일마다 수영장에 모여 집집마다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며 밤늦도록 파티를 했다. 만날 때마다 아이 양육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고충,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삶에 대한 걱정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가 많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기지로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나는 점점 더 수다쟁이가 되어갔다.
어덜트 스쿨에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어덜트 스쿨에는 나와 같이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온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에 온 초반 영어 울렁증으로 마음이 조급했던 나는 두 곳의 어덜트 스쿨을 다니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학교로 열심히 출석을 했다. 나와 같은 외국인들이 언어를 위해 학교를 찾은 만큼 이곳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해 스위스, 독일, 이란, 우크라이나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엘, 마나미, 쉐리, 시몬, 클라라, 타티아나 료코, 나미꼬, 크리스티나, 피오나 모두 어덜트 스쿨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 각자의 집으로 서로를 초대하기도 하고, 카페 데이트를 하기도 하며 가까워져 갔다.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공유하는 포틀럭 파티를 하거나 가까운 해변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하며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어덜트 스쿨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언어로 인한 어려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외국인으로서 생활에 적응해 가는 고충 등 공감대가 많았기에 서로를 응원하며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덜트 스쿨에서의 수업은 기대와 다르게 흘러갈 때도 많아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고, 마음처럼 잘 늘지 않는 언어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만큼은 어덜트 스쿨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임에 틀림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친구들 덕분에 이제 나는 스위스에도, 이란에도, 독일에도, 일본에도 나의 친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언제나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때때로 찾아오는 슬럼프에도 마음을 다잡으며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많은 순간들을 씩씩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