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환 그 이후, 나의 직장생활 28년 (8)

신입대리 중국을 누비다(4)- 실익을 중시하는 그들

by 리본안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한복음 6장 12절)


"아이고, 한 번도 질려고를 안 해요."

이사님은 끝끝내 혀를 차셨고, 앞 좌석에 앉아 있던 H대리는 불안한 듯 뒷좌석을 힐끗 보다가 마침내 끼어들었습니다.

"이사님, 그래도 이사님이니까 잘 들어주시고 R대리님 의견을 많이 받아주시는 듯합니다."

그제야 저는 번뜩 정신이 돌아와, '아, 내가 또 너무 나갔구나'라고 빨리 수습하기 위해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아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또 흥분을 해가지고..."

"아무튼 R대리 덕분에 이번 여정도 지루하지 않았어"

이사님이 오히려 무안하신 듯 허허 웃으셨습니다.

"그건 그렇고... R대리도 대단해. 이 좁은 택시 안에서 내가 치통이 있어 입냄새가 만만치 않을 텐데..."


이사님은 논쟁 중 '충청도 양반이라서'라고 하시고, 이에 맞대어 '저는 부산 촌놈입니다만...'이라며 서로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 전 출신성분(지역색을 따지는 것은 아니고 그때의 우리 개인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이념적 경향에 대하여 미리 실드를 치곤 했습니다.

매일 거의 3~4시간씩 택시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 우리들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시대가 오랫동안 우파가 집권한 시대에서 처음으로 좌파가 정권을 잡은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의 주제는 정치적인 것들이 많았고, 50대 중반의 공무원이셨던 이사님과, 80년 끄트머리 학번인 저는 마치 보수와 진보의 대변인인량 (시간이 넘쳐나는 관계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제를 꺼내 논쟁을 벌이며 그 지루한 이동시간들을 때웠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던 우리 두 사람인지라 중국이라는 땅에 그 방대한 여행계획을 앞두고, 개인적인 기대감도 달랐습니다.

이사님은 마침내 유교의 본고장에 가게 되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계셨고, 저는 삼국지, 초한지, 사기열전 등 역사서에 대하여 광팬이었기에 마침내 이 인물들의 출생지와 활동지를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게 되고, 외국인의 관점이 아닌 본토사람들의 고유한 느낌에 더 다가가 고전들에 대한 더 풍부한 통찰력을 얻게 되겠구나 하는 설렘을 안고 있었습니다.

중국탐사의 여정은 매우 길고, 때로는 긴 이동거리로 인하여 지루한 여행이 될 수 있었기에 가이드 겸 통역이었던 H대리는 어느 지역에 갈 때마다 가까운 유적지나, 관광지, 그리고 맛집 등을 수배하였고, 출장 여정에서 두세 시간의 차량 이동거리 내에 명승지가 있으면 가급적 방문하는 것으로 스케줄을 세웠습니다.

(H대리가 몇 번을 이야기했듯이, 당시 중국 본토인조차도 이러한 기회를 쉽게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H대리의 이러한 배려는 표면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 했지만 소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임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북경의 천안문이나 이화원, 천단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달에서도 보인다는 인류 최대의 건축물인 만리장성을 당연히 방문하였습니다.

(이 만리장성에 대한 방문 소감은 이후 이탈리아 출장 시 방문한 피렌체 여행기 때의 소회와 비교하며 따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얼빈의 안중근의사기념관, 난징대학살기념관, 상해 임시정부기념관 등을 방문하였고, 연변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거의 건너가 북한 지역에서 빨래하거나, 물놀이를 하는 북한 사람들을 가까이서 구경하기도 하였습니다.

천하의 절경인 황산, 황하강, 양쯔강,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는 계림을 들렀었고, 청사, 백사의 전실이 깃든 항주, 미인의 고장이라는 소주, 소호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유적지 중 저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유적지는 삼국지 촉한의 수도였던 사천시 성도시에 있는 공명의 '출사표'가 새겨진 거대한 비석문이었고, 이사님이 가장 보고 싶어 하던 곳은 유교의 대부인 공자의 고향, 곡부였습니다.


"아니, 여기가 공자가 태어난 곳이 맞아?"

그러나 이사님의 기대는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다시 한번 무너졌습니다.

그 유명한 공자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이 조그만 소읍은 여러 가지 유적들이 참 초라하게 겨우 형색만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광장이나, 시장, 어디에서도 북적거리는 인파 때문에 역시 인구 세계 1위의 대국답다는 것을 항상 느꼈는데, 이와 대비되어 공자 관련 유적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버림받고 내팽개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관광객이 얼마 없으니,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었고, 돈을 벌기 위한 조그만 기념품점만이 그나마 관광지라는 티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언제 한 유적지를 방문했을 때 유적지 벽에 삼국지의 사건들이 벽화로 길게 늘어서있는 발견하고는, '이것은 유비/장비/관우가 도원결의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유비가 공명을 데려오려고 공명의 초가집을 찾는 삼고초려의 장면이며, 이것은 그 유명한 적벽대전에서 공명과 주유가 화공이라는 비책을 내놓는 장면이다' 등등 신나게 떠들어 대었습니다.

그리고는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H대리를 바라보며 '그렇죠?'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공감의 반응을 기대하였는데, 정작 중국인인 H대리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저의 호들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삼국지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사실 내용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사님이나 저나 중국의 고전문화에 대하여, 중국의 문명과 문화에 대하여 감개무량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마다 이 중국 본토인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낯설어하곤 했습니다.

의아해하는 두 한국인을 위하여 H대리는 이 이질감이 생긴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위인을 뽑으라고 한다면 중국사람들은 2위부터는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1위는 누구나 이 사람을 꼽는다라고 합니다.

그는 바로 '아Q정전'을 쓴 '뤄신'입니다.

뤄신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지배를 확장하고 있던 시대에 살았던 작가이자 개혁가였는데, 그는 어느 날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간첩 노릇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힌 몇몇 중국 애국지사들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공개처형당하는 장소에 많은 중국인들이 사형집행장에 최대한 가까이 있는 자리를 점하기 위해 아침부터 몰려왔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양손에 만두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피에 만두를 적셔 먹을 생각을 하고 사형수들이 빨리 목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대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이러한 대중의 모습을 목격한 뤄신은 중국인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이 일에 매진하게 됩니다.

공산당이 집권을 하면서 이러한 사상개조 작업들이 전면적인 문화 대혁명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사상교육의 장애물이라고 판단되었던 중국의 고유문화는 철저히 말살되었습니다.

당연히 이후 공산당의 교육체제하에 자란 H대리는 소학교부터 중국 고유의 문화에 대한 교육보다는 자기반성 등 의식개혁을 위한 정신개조 훈련들을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중국이 마침내 시장을 개방하여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사님은 중국을 다니는 동안 중국 남자들이 더운 한낮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통을 벗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자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유교의 발상지라서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격식 등을 따지지 않고, 자신이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각한 일이지만 중국인들은 체면이나 명분보다는 자신에게 편하고 유리하면 그만이라는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왔으니, 중국은 마치 자기에게 가장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본주의 국가로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녁을 먹으러 어느 식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 모두는 중앙의 TV에 몰려 화면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 이제 막 2008년 올림픽 후보 도시가 결정되는 순간이에요. 이건 우리 중국의 국가적인 관심사예요."

그리고 개최도시가 '베이징'이라고 발표되자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인프라, 환경 등에 신경을 썼지만 중국이 가장 고민하였던 것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고유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다시 포장하여 광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을 지탱하고 있는 근본정신이나 문화유산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국가적인 고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오늘로 두 번 만나게 되었으니, 당신들은 우리의 '펑요(朋友)'다."

다시 중국출장 얘기로 돌아와, 우리가 산동성에서 만난 물엿 제조 회사의 사장은 30대 중반이었지만 대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올 때 재빨리 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아주 빠른 시기에 성장하여, 어느 정도 큰 규모의 회사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감과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작년에 상해에서 열린 식품박람회 때, 우리 회사의 부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자신의 회사를 방문하여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니 이제 친구(朋友)로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나이나 국적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중국인들 특유의 실용주의적인 사교성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중국의 실익중심의 사고와 우리의 명분을 중시하는 사고가 만나는 조그만 에피소드를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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