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라이브 단상
학교 주변 보도블록이 새로 깔렸습니다. 가로수도 새로 심겼습니다. 많은 나무들 가운데 야자수가, 그것도 한 곳에 세 그루씩 심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작지만 이 나무들이 자라면 저 공간이 세 그루에게는 좁을 텐데 왜 저렇게 심었을까? 주변에 있는 다 자란 야자수 가로수들은 한 그루씩인데 크게 자랄 야자수를 어째서 한 곳에 세 그루나 심은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검색을 하다가 ‘가로수 식재 기준’이라는 것을 찾았습니다. 가로수는 보행자와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나무 종류 선택하여 도로 양쪽에 같은 종류를 심어야 한다고 되어있네요. 그 외에 간격이나 방제, 가지치기에 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야자수는 하늘에 닿을 듯 곧고 긴 줄기와 높은 곳에만 잎을 나기 때문에 사람과 차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기준에 부합하네요. 이국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니 관광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이 도시에 가로수로 선택된 것 같습니다.
세 그루를 심어 적응을 못해 죽게 될 나무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아마 일정 크기로 자랄 때까지 세 그루가 모두 살아남는다고 해도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릴 수 있거나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두 그루는 베어질 것입니다. 이미 오랜 시간을 적응해 도로에 줄지어 있는 오래된 야자수 가로수가 그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아스팔트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틈을 찾아 물이 닿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가로수는 말라죽을 것입니다.
지금이 6월이고 곧 장마철이 올 테니 운이 좋다면 빗물을 마시며 물이 닿는 그곳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어디선가 가로수의 적응에 대한 글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나무를 도로에 심으면 나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합니다. 도로 위는 흙의 양이 적고, 누가 물을 주는 것이 아니니 비가 오지 않으면 물도 적습니다. 거름을 주는 사람도 없으니 양분도 턱없이 부족한 척박한 환경입니다. 어떤 나무들은 적응에 실패해 말라죽기도 합니다.
검색을 하다보니 ‘가로수 3본 적응법’이라는 검색어가 자동완성 됩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정확하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 표현만으로도 알 것 같습니다. 세 그루를 심어 적응을 못해 죽게 될 나무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아마 일정 크기로 자랄 때까지 세 그루가 모두 살아남는다고 해도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릴 수 있고 온전한 한 그루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두 그루는 베어질 것입니다.
도로 위에 가로수는 안간힘을 쓰며 아스팔트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틈을 찾아 물이 닿는 곳까지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뿌리가 물을 찾아 내지 못하면 얼마남지 않은 온 힘을 뿌리내리는 데 쏟아 부은 가로수는 더 빨리 말라 죽을 것입니다. 지금이 6월이고 곧 장마철이 올 테니 운이 좋다면 빗물을 마시며 물이 닿는 그곳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그래서 가로수를 장마철 직전에 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학교 앞에 새로 심긴 가로수의 고단한 생존을 학교 안에 아이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태어난 가정을 떠나 학교와 사회라는 다소 척박한 환경으로 옮겨져서 빼곡히 심긴 아이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공간보다 더 작은 공간과 여유 없는 시간 속에서 ‘적응’이라는 숙명에 ‘생존’을 걸어야 하는 모습이 야자수와 닮았습니다. 아이들의 시간도 가로수의 시간만큼이나 필사적이겠죠. 운이 좋다면 스스로 뿌리를 내려 물을 찾기 전에 배움과 성장이라는 빗물이 아이의 뿌리내림의 시간을 연장해주겠죠.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 물을 찾지 못하고 비도 내리지 않으며 누군가가 물을 주지 않는다면 뿌리를 내리다 지친 아이는 오히려 더 빨리 말라 버릴 수도 있겠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보이는 아이지만 어떤 아이는 목마름에 뿌리 내릴 힘도 잃고 말라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로수를 심는 방식을 교육 현장과 삶의 현장에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하는데 시야를 가린다, 통행에 방해된다, 잎이 너무 떨어져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부적합’ 하다고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개별성에 대한 고민이나 환경을 바꿀 여지는 남겨두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맞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적용하여 기어이 인재를 ‘배출’하는 학교의 모습이, 특별 보충학습을 하고 학원을 보내며 아이들의 학업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숫자로 치환되는 성과를 과시하는 교육 당국의 모습이, 가로수를 세 그루 심어서 한 그루만 남겨도 성공이라는 ‘가로수 3본 적응법’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한 비약이기를 바라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목표와 기대에 의해 ‘잉여’나 ‘부적합’으로 규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목표나 기대와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기꺼이 다른 토양과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