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보면 열을 알까요?

지금 여기, 라이브 단상

by 연꽃 바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자주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누가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한결같이 정돈된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하는 선언문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모멸찬 평가를 할 때도 자주 소환되는 문장이었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낯선 친절을 마주 했을 때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축원하는 마음으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과 쌍벽을 이루는 말이기도 하죠.


하나만 봐도, 떡잎만 봐도, 부분만 보아도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일반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제가 없이 사람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한다면 많은 가능성들은 펼쳐지기도 전에 꺾여 버리겠지요. 사고의 칼날을 벼려서 딱 잘라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쾌도난마의 태도는 상대방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에 나선 무사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이 문장들을 들을 때 가슴에 뭔가 거스러미 같은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키우면서입니다. 입학은 했지만 아직 글을 잘 읽지 못하고, 연필을 바르게 쥐기가 어려워 1쪽짜리 숙제를 하는 데 2시간이 걸립니다. 마음이 급할 때는 수저보다 손가락이 먼저 나가고,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스크를 쓴 입 주변과 옷에 음식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신발 대신 실내화를 신고 집에 올 때도 있고, 더워서 벗어 둔 겉옷을 챙기지 못해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티셔츠의 앞뒤를 바꿔서 입거나 양말의 뒤꿈치가 발등에 오게 신기는 기본이며 이제야 신발의 좌우를 바르게 신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아이의 떡잎을 본다면, 아이의 이런 하나를 본다면 우리 아이를 어떤 나무로 보고 아이의 열을 무엇이라 판단할까요? 그 칼날이 두려워서 밖에 나가면 잔소리가 2배로 늘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다른 사람 못지않게 갈아둔 저의 칼날을 조용히 거두게 되었습니다.


칼을 거두니 그 아이의 ‘하나’가 더 자세히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하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그 모습을 알게 되니 날 선 판단이 대신에 이해와 사랑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보다 보니 그 ‘하나’에 담긴 ‘열’이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무척 다양한 모습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이 문장은 하나를 자세히 본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문장이 아닐까요. 제대로 알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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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휘두른 쾌도는 베어버리려고 한 대상뿐만 아니라 주변 대상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누군가의 판단이 입 밖을 나와서 다른 사람의 귀로 들어가며 그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다시 입으로 다시 귀로 옮겨 갑니다. 옮겨 가면서 보태어지고 변화하며 계속해서 사실과는 다른 ‘말’의 생명이 이어지고 사실과는 별개의 ‘거짓’이 ‘진실’이 ‘진실 보다 더 견고한 위장된 거짓’이 생명을 이어갑니다. 그 말들의 대부분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쾌도를 휘두를 수 없습니다. 제대로 알고 사랑하게 되면 그 많은 가능성 때문에 벼려둔 칼날을 꺼내지 못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상대를 베어낼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온전한 ‘존재’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제대로 보자고 몰입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을 알고 사랑하게 되기 전의 나를 돌아갈 수 없는 인식의 화학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기 전에 ‘나’와 사랑한 후의 ‘나’는 분명 다른 존재가 되어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나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를 제대로 알아가는 진정한 ‘만남’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만남은 앎이 되고, 앎은 사랑이 되며, 사랑은 성장이 되고, 성장은 새로운 나의 ‘존재’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를 알면’이라는 만남의 순간에 집중하고 판단의 칼날이 아니라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려 합니다. 새로운 만남 앞에 날개를 활짝 펴고 환대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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