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처럼
나는 깔끔 떨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기신지 벌써 13년째다. 어머니는 폐암 말기 6개월을 선 고 받고 1년 반을 더 살다 가셨다. 시골집에 가면 주춧돌 옆에 기대고 앉아 “내가 왜 이리 힘이 없노?” 하시면서 기대어 계셨다. 그러면서 진주 아들 집에 와서는 힘을 내셨다. 친구도 만나서 노시고 손자들도 돌보셨다. 한번은 퇴근길에 시내에 와서 집에까지 좀 태워달라고 하셨다. 손자들 해 먹일라고 장을 봤는데 도무지 힘이 없어 집에까지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시어머니가 계셨고 때에 맞춰 집에 가서 저녁 밥을 차려 드렸다. 어머니도 자신이 반찬을 만들어 아들과 손자들을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딱 동생이 아파트 입구까지 태워 드리고 돌아왔다.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아프면서도 힘이 없어 못하겠다고 아들 내외에게 털어놓지 못하셨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열심히 사는 며느리에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암센터에서 약물 치료를 권고 받았을 때 이야기도 어머니의 성격을 말해 준다. 의사가 이 약을 처방해 보고 잘 받지 않으면 다른 약으로 바꾸어 준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거절하셨다. 약물 치료 자체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퇴원하신 것이다. 자기 몸이 실험쥐도 아니고 먹어보고 안 들으면 약을 바꾼다는 말에 병원 의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셨다. 살날이 6개월밖에 안 안 남았는데 집에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다가 가겠다고 하셨지만 그렇게 힘이 없어 하셨다.
그러면서 젊었을 때 가고 싶었던 인도 불교 순례도 다녀오셨다. 인도 불교 순례를 가고 싶어 적금을 넣었는데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바람에 못가시고 오랜 세월 뒤에 죽음을 앞두고 다녀오신 것이다. 동생들이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들인 것이다. 여동생과 대만도 다녀왔다. 나는 그 여행에 함께하지 않았다. 여동생이 모시고 다녔다. 인도 여행 때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올케가 불러서 갔더니 어머니 옷이라고 한 보따리 싸 주었다. 나는 키가 어머니보다는 조금 컸다. 외투는 없었고 여름 겉옷과 속옷이 많았다. 러닝이 새하얗고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뭔 새 옷을 이리 개어 놓았을까 하면서 펼쳐보니 새 옷이 아니었다. 얼마나 보얗게 삶아 씻었으면 흰 색이 더 흰 색으로 깨끗했다. 그런데 난닝구(러닝)들은 죄다 겨드랑이가 없었다. 나처럼 열이 많은 어머니는 땀을 겨드랑이로 다 흘리셨는지 삭아서 겨드랑이가 없는데 나머지 부분은 너무나 새하얀 새 옷이었다. 마치 팔다리가 달아난 상의군인을 본 참담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삶은 면 속옷을 다 삭힐 만큼 열심이셨던 것이다. 집안 일, 손자 돌보는 일만이 아니다. 주소는 진주인데 고향이 사천군이다 보니 고향 동네에서 많이 지내셨다. 아버지께서 직장을 그만 두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구멍 가게를 하다가 아버지기 55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시자 57세의 나이로 과부가 된 어머니는 아들네 집으로 합가하여 함께 하신 것이다. 아버지 친구분들게 이런 이야기는 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안 계신데 자식들 잘 돌보고 잘 살아주셔서 참 고맙다.”
어머니나 나나 고지식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일하는 것 밖에 모르는 것은 닮았다. 어머니는 사천군 부녀회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하셨다. 반찬 봉사, 노인들 목욕 봉사를 마다않고 열심히 하셨다. 셈이 빠르고 공명정대하셨던지 동네에서도 초상이나 결혼이 지면 목돈을 어머니께 맡기고 일을 치르게 했다. 그 많은 전화 번호를 다 외우셨고 은행가서도 계산기가 필요없었다고 한다. 은행원보다 계산이 더 빨랐다. 나는 그런 머리는 하나도 안 물려받았고 뚝심만 물려받았다. 가끔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던 청동화로나 놋그릇 등을 다 팔아버리고 집안의 상징을 다 없애버린 게 아쉽기는 하지만 신문물 앞에서 편안하을 택한 어머니의 선택에 뭐라 할 수는 없다. 기와 가루를 빻은 가루로 매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진주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진주에 이사와서 하숙을 치셨다. 주로 친인척이었다. 6촌 오빠들과 외삼촌들이었다. 연료가 연탄불에서 가스로 바뀌고 보일러로 바뀌는 세상을 어머니도 나도 겪었다. 나는 근대와 현대를 겪은 사람이다. 참 신기하다. 이젠 역사 속의 삶을 살아온 나 자신이 박물관의 귀중한 물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차이 나지만 그게 뭐 큰 대수인가. 살아있는 나나 돌아가신 어머니나 매한가지로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더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가끔 행주를 새하얗게 삶아 씻어 본다. 옛날 어머니의 모습을 조금씩 흉내 내 보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행주가 안 깨끗하면 참지를 못하셨다. 비누를 넣고 세제를 넣고 푹푹 삶아서 손빨래를 하셨다. 내가 채 써는 것도 행주 빠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다. 늘 공상가였고 공부한다고 책상 앞에만 붙어 있던 10대를 보낸 딸이었으니까 어머니 일손은 제대로 도와 드린 적이 없다.
꿈에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는 어머니의 깔끔한 정신력을 돌이켜 보게 된다. 폐암을 견디다 드디어 고통 때문에 입원을 하셨다. 화장실을 혼자서 못 보게 되었을 때부터 식음을 끊으셨다고 한다. 간병인이 그렇게 전했다. 하기는 틀니를 하신다는 것을 나는 딸인데도 평생 몰랐다. 집에 있는 자식도 어머니의 틀니 구경을 별로 못했을 것이다. 자기 전에 빼놓은 틀니는 자식들이 깨기 전에 끼었을 거니까. 그리고 매일 입는 속옷을 그렇게 삶아서 보얗게 새 옷처럼 개놓은 것, 걸레까지 행주처럼 새하얗게 삶아 놓아야 적성이 풀린 분인 걸 자랑스럽게 말할 순 없다. 나는 어머니보다는 좀 더 살고 싶다. 꿈에 한 번 나타나 주시지 하는 날도 있고 잠에서 깨다가 “어머니” 하고 불러보는 날도 있다. 어머니는 오시지 않지만 나는 내 안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 어머니의 딸이니까 가능한 일들을 하고 산다. 힘닿는 데까지 어머니는 열심히 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