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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점선 Sep 18. 2024

1년에 13개의 제사, 그리고 명절

어머니의 어깨

 간단하게 준비한 챠례를 지내고 8시 45분에 성묘를 다녀왔다. 딸이 "와!  디저트 제사상이다."한다. 1996년도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은 2013년도에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도 1996년, 친정어머니는 2011년도에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큰 생선을 찌기 위해 지름이 1m가 되는 찜기를 샀다. 

무조건 정성이 최고라고 기억에 남는 대로 제사상을 차렸다. 내 기억 속의 제사상에는 나물, 돼지고기 수육, 산적과 소고기 조림인 서래, 삶은 문어. 탕국, 밤, 대추, 곶감, 사과, 배와 계절 과일. 떡, 유과, 약과. 명태포, 꽃문어, 생선, 육전, 어전  등이  올랐다. 생선도 후손을 도와준다고 돔, 조기, 후손을 밀어준다고 민어, 서대, 때론 볼락이나 가자미도 올렸다. 과일은 국산 과일만 올렸다. 올해는 제주도산 애플망고를 올렸다. 함께 사는 딸이 제사음식이 다 못 먹고 버리는 게 많다고 할 때마다 음식을 줄여야한다고 아우성이었다. 몇 년 전부터 수육을 안 올리고 문어만 올렸다. 생선도 홀수로 올리는데 한 마리씩만 준비한다. 떡은 아예 안 먹고 미루다 버릴 때도 있었다. 제사 음식은 이웃과 나눠 먹어야 되는데 주말이 맞아야 나눌 수도 있고 직장에 가서 나눠  먹는 것도 세월이 흐르자 환영받지 못했다. 가끔 딸이 쌀 케익을 구워서 올리기도 했다. 유과나 약과도 쿠키가 들어오면 쿠키로 올렸다. 

 이번 추석 차례상은 더 간편해졌다. 귀한 애플망고도 들어와서 올리기로 했다. 육전, 어전,  두부구이, 생선구이 외에는 과일이 주를 이룬 차례상이다. 송편을 만든 해도 있었지만 가끔 사서  올린다. 쫀득하고 달콤한 속이 톡 터지는 송편맛이 보고 싶어 한 되 떡집에 주문해서 샀다. 하지만 깨소금을 넣어 만든 고소한 맛은 없었다. 내년엔 일을 잘 조정하여 직접 만들자고 약속했다.식도락가이기도 한 딸은 음식 남기거나 버리는 것을 절대적으로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올리던 제사 음식을 시대에 맞게 바꾸거나 양을 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딸의 사상과 나의 관념이 절충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사를 준비하는 요즘 딸은 제사도 버리고 가자고 부추기고 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까지 지낼 생각이라고 밝히자 딸은 제물 가지수라도 줄이자고 하여 줄여나가고 있다. '찬물 한그릇이라도 정성을 다하면 된다.'라는 말에 기대어 본다. 

 어린 나이에 어린 남편에게 시집와서 할머니 대신 증조할머니께 곶간 열쇠를 바로 물려받고 집안 일을 도맡아 하신 친정어머니의 가사노동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내 막내 딸처럼 조금 줄이자거나 어머니가 너무 힘들진 않을까 생각해 본 기억이 없다. 어릴 때부터 온 동네 일이 되어버린 우리 집 제사는 가마니 위에서 가와 가루와 짚으로 놋그릇 닦는 일부터 시작된다. 마른 장 보기부터 어머니의 머리 속에는 제사준비가 다 짜지고 있었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못그릇 닦기가 시작이었다. 동네 분들이 마당에 가마니를 펴 놓고 잿빛 기와 가루를 묻혀 놋그릇을 닦으셨다. 매달 제사를 지낸 셈이다. 

 어떤 제사에서는 마루가 좁아서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절을 올리기도 했다. 제사 때마다 20명이 넘는 친척이 모였다. 어린 나는 많이 오시는 친척 수를 헤아려 보았는지 26명이라는 수가 기억에 남는다. 고모부만 5명었다. 다 돌아가시고 고향동네에  넷째 고모부만 살아계신다. 아버지의 사촌 가족들이 가까운 이웃 마을에 사고 계셨다. 서울에 계시는 큰 할아버지 후손인 장손은 제사를 포기했고 동생인 할아버지께서 집안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 제사를 고스란히 다 물려받았다. 

시골에 살 때 제사 음식을 나르던 모습이 남아있다. 제사를 한 밤중에 지내기 때문에 어머니는 사과 등 과일을4조각 내어 종류마다 한 조각씩 담고  전도 골고루 다 담고 탕국과 술까지 나누어 이고 이집 저집 제사 음식을 날랐다. 나는 주전자를 들고 따라다녔다. 내 기억 속에 새벽 달이 떠 있는 어스름한 길을 어머니와 다녔던 모습이 한 장 남아있다.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누는 내력은 친정 올케가 지켜오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제사상에 오르던 것만 올렸는데 올케는 남해 출신이라 올리는 생선 규모만 봐도 어마어마하다. 소라나 전복조림은 일품이다. 우리 집에서는 올리지 마라고 한다. 남편은 가만 있지만 딸들은 난리다. 제사 음식을 늘리지 말라고 계속 엄마를 세뇌한다. 그러면서 보수적이라고 놀린다. 올케가 어머니 딸이고 나는 시집의 딸이 되었다. 올케는 나보다 더 오래 친정어머니와 살아서 시어머니가 모시던 제사 모습을 따라하게 된 것 같다. 

 시댁은 종가댁이 아니어서 결혼 초에는 시아버지와 남편만 종가댁에 제사를 지내고 왔다. 명절 때도 남자들만 참석해서 시가댁 친척들 얼굴도 못 보고 지낸 셈이다. 사촌 시동생을 직장에서 만났는데 나는 몰라보고 있는데 시동생이 인사를 건낸 적이 있다. 시댁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은 시어머니 풍습이다. 친정 어머니는 온 가족과 친척들의 어머니셨다. 진주로 이사 온 후 진학한 친척들 오빠들이 거의 우리 집에서 하숙을 했고 종가에서 지낼 제사를 그렇게 아울러 지내주셨다. 돌아가실 무렵에야 우리 집안 외에 윗대 제사를 시사로 모아서 지냈다. 그리고 2011년도에 72세의 나이로 어머니 수연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몇 년 만에 동생은 어머니, 아버지 제사만 빼고 시사로 다 모아서 지내게 되었다. 

 동생 내외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제사 준비를 정말 잘 한다. 때가 오면 삼천포로 수산물을 사러 가고 이 장 저 장에서 필요한 제물을 구입한다. 동생도 올케의 제사 준비에 감탄을 한다. 가끔 누나 앞에서 너무 칭찬을 해서 '재가 팔불출?'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잘 하는 건 잘 하는 것이다. 이제 올케도 나이가 들어 제사 음식을 좀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부산에 있는 동생네도 전날부터 일을 도우고 명절때는 서울 사는 막내 동생네도 도착하자마자 소매를 걷어올리고 음식 준비를 한다. 집안 분위기가 어째 큰올케가 군기반장같다. 

보기가 좋긴 하다. 준비하는 큰 올케가 힘들겠지만 제사를 지내고 제사 음식을 골고루 싸주고 덤으로 참기름 한 병씩 넣어주는 것도 꼭 친정어머니다. 보고 배운대로 하는 것이 맞다. 

 결혼 후 시집에서는 제사가 없었다. 나는 땡초와 방아가 들어간 부추전이 먹고 싶어 경비원 아저씨께 부탁하여 명절 끝난 후 한 점 얻어먹기고 하였다. 그래서 제사가 없어도 제사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제사상이 그려졌다. 20여년간 한 달에 한 두번 꼴로 제사상을 봤으니 머리에 박혀있는게 당연하였다. 탕국을 끓이고 전을 붙이고 산적도 만들고 돼지고기도 삶았다. 수육은 시아버지께서 좋아하신 음식이다. 제사를 를 지낼 때마다 살아계실 때 좋아하신 음식을 좀 더 자주 해드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제사는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아있는 후손을 한 자리에 모아 한 핏줄임을 상기시키고 결속을 다지는 장치라고 본다. 요즘은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살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서 더욱 제사 때 모이기 어렵다. 더욱 여성들이 음식을 만드는 등의 가사 노동을 싫어한다. 문화는 유동적이다. 움직이는 유기체같다. 

 지금도 친정 친척들은 나를 보면 반가워하신다. 어릴 때 아버지의 외삼촌집도 한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외갓집은 산 하나 넘어가면 있는 막골이었고 오촌 고모는 수곡이었다. 방학 때면 할머니와 수곡 고모집에 가서 며칠씩 묶다가 오곤 했다. 평소에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80이 넘어도 밭일을 하다가 나를 만나면 아버지 외사촌 동생인 아제는 "내가 널 업어 키웠다." 하시고 완사 장에서 신발을 파시는 오촌 고모는 " 엄마가 친시누이들보다 우리 하고 더 친했다." 며 팔려고 가지고 오신 가지며 자외(오이 일종) 등을 한 보자기 싸 두신다. 모두 친정어머니께서 함께 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날 보면 어머니 생각이 그렇게 드시는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안타까워 하신다. 나도 제사 음식을 다 소화 못 시켜서 딸에게  음식을 만들지 마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는 이 제사 음식을 나눌 이웃도 없고 직장에 나간다고 시간도 안되는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생긴다. 가끔 어린 나이때부터 집안 일을 도맡아 하신 어머니나 비슷한 나이부터 집안 일을 한 나도 책임감으로 한 것인지 어릴 때부터 무조건 따르고 일해야한다고 가스라이팅 당한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일을 마다않고 하고 있다. 거의 100년 전의 사람인 시어머니도 싫어서 버린 일을 나는 안아서 해 내고 있다. 순전히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은 가치관인 것 같다. 대물림이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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