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을 만들다가
화요일인 오늘은 일주일 중 오전이 한가로운 시간이다. 원래 대학에 강의를 나가다가 이번 학기부터 안 나게 되어 한국어 강사로 나가는 학교에서 시간표를 조절하기가 어려워 화요일은 오전이 비는 시간이다. 오후에는 늘봄학교 한글자도 강사로 나가기 때문에 퇴임전보다 수업일수가 많다. 쉬는 시간이 좋다는 건 뭇 쉬어야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늦잠을 자도 좋고 아침 장을 다녀와도 좋고 산책도 할 수 있고 책을 읽어도 좋고 오후 수업을 준비해도 되는 시간이다. 2시에 오후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라 그야말로 느긋하다. 몇 시간의 자유시간이 이렇게 달콤한 것을 몰랐다. 늘 일에 빠져 무엇이든 해야 하는 그야말로 일 중독자(딸의 말로는 일종의 정신질환에 가까운 인정욕구가 너무 강한 사람)로 늘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 화요일도 점심을 새 밥을 해서 남편 식사를 준비하고 나도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출발한다. 퇴직을 처음 하고 난 후 하루에 세 번 남편의 밥을 차려보니 숨이 가파졌다. 앞으로 계속 밥 차려주며 이렇게 살아야되나 하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반 년만에 갑자기 일이 생겨 아침 8시 반 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오후 수업이 일찍 시작하는 날은 근무하는 학교 5분 거리에 있는 친구 집에서 국수를 사 먹었다. 화, 수, 목 3일은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출근하는 막내 딸은 나름대로 혼자서 차려먹고 설거지하고 나간다. 그러면서 가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좋아한다. 딸은 바쁜 엄마가 아빠 밥을 차리는 데 의의를 제기했다. 혼자 드시게 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남이 함께 있어도 배고플 때 밥을 나누어 먹는게 어릴 때의 정서였기 때문이다. 시골인심은 그렇다. 이웃집 아주머니나 친척이 친정을 가거나 며칠 집을 비울 때는 가까이 사는 이웃이나 친척은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가.”하고 말했다. 반찬도 챙겨주기도 한다. 그런 인심은 텃밭에서 농사지은 걸 나누기도 하고 많이 구입한 식재료를 가까운 사람과 나누기도 한다. 아침 일찍 잡곡을 불려놓고 조금 전에는 쌀과 미역을 불려놓았다. 11시에 시작하면 12시경에는 점심을 차릴 수 있다.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어볼까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걸 하려고 앉았다가 저걸 하기도 한다. 청소를 하다가 방바닥에 앉아 시집에 빠져 청소는 잊어버리기도 한다. 요즘은 고향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사진도 찍어드리고 나와의 인연을 정리도 하고 싶고 근대의 유물인 좁을 골목길 투어도 하고 싶다. 그런데눈 앞에 일이 밀려와 요즘은 토요일 다문화 교육 봉사까지 하느라 일요일 뺴고느 쉬는 날이 없다. 일요일도 밀린 일이 많아서 가끔 시간표를 짜서 일요일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늘 생활 계획표>
해야할 일
클루지 발제: 8:00-9:00
일신 세상 공문만들기: 9:10-10:00
식사: 10:10-11:10
도동수업계획서 쓰기: 11:10-12:30
방과후 미술 교육사 연수12:40-1:30
한국사 공부: 2:00-2:30
지난 9월 1일 일요일에는 일이 밀려있어 이렇게 시간표를 짰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할 때도 과목을 나누어서 짧게 짧게 공부를 했다. 일이 빨리 끝내면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영화에 빠져 한국사 공부는 아예 시작도 안하고 오후내 영화를 보기도 했다.
11시가 되면 부엌으로 가서 전기밥솥에 밥을 앉히고 미역국을 끓이고 제주에서 보내온 옥돔을 구울 것이다. 밑반찬으로는 마늘, 마늘쫑 장아치, 표고버섯 전(표고버섯, 양파, 당근, 잔파 다져서 달걀, 금곡 앉은뱅이 통밀가루 조금 소금 조금), 깻잎찜, 파김치가 있다. 요즘 자주 먹는 것은 묵은 김치 덧밥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국을 끓여 보기로 한다. 방아가 들어간 된장국, 땡초가 들어간 씨락국이 끊나고 몇 끼를 국물없이 먹었다. 13분이 남았지만 책을 한 페이지라도 읽고 시작하기로 한다. 요즘 읽는 책은 <클루지>와 <시대예보>이다.
미역을 아침 장에서 사서 방치했더니 약간 누런 빛이 돌기 시작했다. 조개 껍데기가 달려있는게 공장에서 만든 게 아니라 수공업으로 말린 미역같다. 몇번을 씻어야 했다. 봉지에 가공된 미역보다 부드러웠다. 싱싱했을 때 여름철 초무침으로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조금 아깝다. 버리기 전에 새 미역 사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한다.
참기름을 달구어 홍합을 먼저 넣고 새우와 미역을 넣어 중불에서 볶듯이 끓이다 간장을 넣고 더 끓여준다. 나물 볶듯 한참을 끓이다 물을 넣어 센 불에 끓인 다음 불을 낮추고 미역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인다.
새우와 홍합은 냉동실에 사 두었던 싱싱한 걸로 사용한다. 올 봄에 사나 새우와 홍합, 조개는 올 여름 내내 잘 먹었다. 새우는 고구마 줄기 한번 볶아먹고 추석 때 탕국에 넣으면 다 사용한다. 홍합은 다져서 국수 양녑으로 만들어 먹으면 맛있다. 남은 것에서 국수 양념을 하고 나머진 방아와 매운 고추와 부추를 넣고 부추전을 만들어 먹으면 된다. 조개살이 오히려 잘 먹히지 않았는데 약간 질기고 조개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조개는 역시 살아있는 껍데기 조개구이 최고다.
표고버섯 전 재료
버섯 전과 옥돔 구이, 옥돔이 다 바스라졌지만 고소하니 맛있다. 버섯전이 맛있다고 추석 때 언니가 오면 만들어 주자고 딸이 말했다.
옥돔은 해동시키자 마자 굽는다. 그래야 비리지 않다. 항상 팬에 올리지마자 옥돔 등에다 참기름을 두른다, 그러면 냄새도 잡고 고소하다. 어머니는 달걀에 잔파만 다져넣고도 동그란 전을 부쳐주셨다. 밥솥에 쪄주시던 달걀찜은 어디서도 못 먹어봤다.
어릴 때는 진주로 오기 전까지 불을 때서 밥을 했다. 큰 검정 무쇠솥안에 다 넣어 밥물이 들어간 계란찜은 부드럽고 맛있었다 그 향을 설명할 수가 없다. 계란찜을 밥 위에 얹어 참기름 한 방울을 뿌려 비벼 먹었다. 집 안에 닭장도 있어 제법 여나무 마리 닭을 키웠다. 소마구도 있었고 마굿간도 있었다. 아랫채 옆 대문 입구에는 큰 대추나무가 있었고 뒤안에 지붕을 뒤덮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아랫채에는 노할머니께서 긴 담뱃대를 부시고 앉아 계신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복주머니처럼 생긴 주머니를 우리는 줌치라 불렀는데 지금의 작은 가방 정도의 용도로 담배나 커다란 눈깔 사탕이 들어 있었다. 인사하러 내려가면 줌치에서 사탕을 꺼내 주셨다. 증조할머니는 시집오실 때 가마를 타고 몸종까지 따라온 양반집 딸이었다고 한다. 우리 집은 시골 가난한 농사꾼 집이었는데 고모들이 시집간 집이나 왕고모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난한 시골 집 딸들이 학자나 부잣집 며느리가 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여쭤 보았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집안 보고 딸들을 데려간 것이라는 답을 들은 기억이 난다. 증모조가 돌아가시고 집을 약간 고쳤는데 할머니께서 지내시던 아랫채를 허물고 곶간과 물레가 있는 아랫채를 지었다. 어머니게서 싱아를 왔다갔다 하면서 실을 짜던 모습은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리고 농기구가 걸려 있고 시커먼 재를 부어놓거나 짚을 쌓아놓던 곶간에서 우리가 당시 거지라 불렀던 집없는 가족들이 한겨울을 나고 떠나곤 했다. 당시는 박을 말려 바가지로 사용했다. 밥을 바가지에 담아서 나눠 주셨다. 기억에는 없지만 반찬도 함께 주셨을 것 같다. 딸이 아빠 밥 좀 그만 차려 드려라고 했을 때 " 남이라도 옆에 있으면 밥을 차려줄 건데" 라고 대답해서 딸 입을 막았다. 대문이 항상 열려 있고 누구나 드나들면서 밥때가 되면 한 자리에 모여앉아 끼니를 나누던 시절을 보내고 보고 배운 탓이다. 나도 내내 몇 십년 시집와서 아쉬운 게 시집의 풍습이 친정과 너무 다른 점이 인 가족 외에 아무도 가족이 아니었던 점이다. 온 동네 사람이 하나 식구였던 촌뜨기는 그런 게 아쉬웠다. 나중에 어머니는 몇 백명이 먹을 나물도 양을 맞춰 척척 무쳐 내셨고 오이 냉국, 장떡 반죽, 동지 팥죽 엄청난 양도 척척 다 만들어 내셨다. 72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아는 분들은 다 아까운 양반이라고 한다. 나도 약간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 받은 것 같다. 살림을 규모있게 관리를 못해서 돈은 모운 게 없지만 부지런히 좋은 음식을 만들어 자식을 먹이고 시부모님을 37년간 모시면서 음식을 다 만들어 드린 것은 분명 우리 친정어머니 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