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이사를 준비하며
책을 읽다가도 어릴 적 초가집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보다 어린 시절이 더 그리운건 아닐까? 자꾸 고향 집에 집착하는 걸 보게 된다. 그림이라도 배워 머릿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어반 스케치라는 기술을 배워 여행 가는 곳마다 스케치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첫 번째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그리고 발전해 가는 그림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우선 두 칸짜리 초가지붕과 축담과 마루, 정지라고 쓰진 검은색(기름 냄새가 나는 철도 가름목) 부엌문, 왼쪽의 장독간, 장독간 왼쪽의 석류나무와 돼지 마구와 닭장과 변소가 있던 아래채의 소 우리와 마구간을 등진 서향의 증조할머니방과 할머니 방을 내려다보던 감나무와 대추나무와 대문과 담장과 뒤안(뒤꼍)과 뒤안의 대나무가 우리 집 배경이다.
초등학교 3학년 3월 1일에 진주로 전학을 와 버렸지만 어린 시절 지냈던 고향 동네가 선명하게 필름을 돌리고 있다. 교사 시절 전학 온 학생들이 반에서 잘 어울리길 바랐다. 아이들은 금세 함께 뛰어놀며 지냈지만 은근 중에 힘자랑을 한다. 잘 하는 것이 있으면 그걸로 아이들 속에서 존재감을 심었다. 축구를 잘 하는 아이는 축구로,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그림으로 또는 노래, 춤 등으로 자신감을 심어나갔다.
초등학교 3학년 3월 1일진주로 전학 온 나는 어땠을까? 부끄러움이 많은 촌뜨기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어머니께서 외삼촌이나 6촌 오빠들 하숙을 치셨기 때문에 항상 집이 붐볐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사돈 댁 연탄까지 재워놓은 창고 같은 방 하나에 온 식구가 함께 지냈다. 연탄가스 사고를 어머니와 동생들이 다 쓰러지는 사고가 난 후에 이웃에 있는 2층 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당시 대아고등학교라는 사립 고등학교가 집 가까이 있었다. 명문고 진주고등학교에 떨어지면 대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6학년 때 1971년도에 동명고등학교 건물이 새로 신설되었다. 1952년도에 해인고등학교로 시작한 학교로 학교이름을 동명으로 바꾸고 시작하였다. 동명고등학교 개명과 학고이전 기념 백일장에서 당시 6학년이던 내가 장원을 하여 그 많은 오빠들이 있는 교정에서 상을 받았다. 제목이 “아침‘이었는데 그 시가 오랫동안 학교 골마루에 걸려있었다는 걸 초등학교 남자 동창들이 알았다. 기억나는 구절은 ’늦잠 잔 해님이 부끄러워 얼굴 붉히고 고개를 쑤욱 내민다.‘ 이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시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도서관을 찾고 책을 좋아하는 것은 집안 물림인 것 같기도 한데 우리는 당시에 너무 가난해서 처음 이사 온 후 두 번째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마당도 없는 가게 방에서 지냈고 2층에는 하숙생 친척들이 살았다.
친구들도 기억나는 몇 명을 빼고는 다 고만고만한 지붕이 낮은 집에 살았다. 홍자, 행임 당시에 가까이 살던 친구들이다. 홍자는 연락이 끊겼고 행임이는 가끔 동창회 모임에서 만날 수 있다. 아이스께끼(막대아이스키림의 전신)를 팔았던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현옥이는 진주에서 미장원을 운영하고 중학교와 여고를 같이 졸업한 영현이는 약사를 하고 있다. 현옥이 아버지는 경찰이셨다는 기억이 난다. 영현이는 얌전하고 자그마한 여학생이었는데 집안이 부유했던 것 같다. 집에 들어서면 입구에 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순전히 52년 된 기억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드디어 신안동으로 집을 지어 이사를 왔다. 그 집으로 이사 온 후 우리는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되었다. 먹지는 못하지만 우물도 있었다. 직사각형 집터에 동쪽으로 지을 짓고 서쪽에는 우물이 있는 밭이었다. 그 집을 팔고 수정동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신안동에서 사는 몇 년 동안이 나에게는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책장에는 정음사 출판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었다. 아버지는 기름이 절은 옷을 입고 계셨지만 레코드를 자주 틀어 노래를 들으셨고 우리에게 글자를 가르치셨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오동나무 3층 장과 책상이 있었다. 책상은 내가 공부할 동안 내내 사용했다. 짙은 밤색으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만드신 거라고 할머니께서 늘 자랑하셨다.
지금 진주 법원으로 올라가는 진주 다문화센터 자리에 셋째고모가 사셨다. 고모부는 당시 진주교육대학교 학훈단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계셨다. 군에서 무궁화를 다신 소령 출신이신데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다보니 땅 때문에 다툴 일이 있어 미리 사표를 쓰시고 나오셨다. 혹시나 군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해서였다. 나는 고모부께서 청렴한 군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딱 그림에 나오는 갸름한 조선 선비 얼굴을 하신 분이셨다. 신안동 집 앞은 남강을 끼고 온갖 수목과 채소와 밭작물이 자라는 벌판이었다. 여름철에 우리가 남강에 놀라 가면 부모님들은 참외며 오이 등을 따서 주셨다. 우리는 모래톱 옆에 받아온 것들을 띄워놓고 마음껏 놀다가 베어 먹곤 했다. 참마열매가 조롱조롱 달려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건 어릴 때 좀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해기지면 반디불이를 쫓아다니며 뛰놀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내 얼굴은 검고 반질반질해졌다. 책이라고는 안 봐서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져 등교를 했다. 그래서 개학하면 집중력이 폭발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암기력이 좋긴 했다. 창의력이나 분석력은 떨어졌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암기력으로 공부를 잘 하는 학생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신안동 살 때 6학년에 한 반이었던 경자네 집에 자주 갔다. 말하자면 경자네 집은 신비 그 자체였다. 사과나무도 있고 딸기과수원이 있었다. 상철이라는 친구도 이웃에 살았고 박하를 많이 키우던 채선이 언니도 살았다. 상철이는 초등학교 이후로 본 적도 없고 채선이 언니는 지금도 잘 만난다. 다재다능하고 인정이 많으시다. 언니의 어머니는 80이 넘으시도록 일본어를 가르치시려 다니셨다. 그 추억 많은 신안동 집을 떠나 수정동으로 이사를 가서 어머니는 막내외삼촌과 외사촌 오빠를 집에서 하숙을 치셨다. 그때는 쌀이나 보리 등 곡식으로 하숙비를 받았고 동생과 조카이니 돈벌이는 아닌 것 같고 타지에 남학생들을 혼자 두니 함께 사신 것 같다. 그 집은 방이 많아서 막내외삼촌, 외사촌 오빠가 같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마가 지면 부엌과 마당에 물이 찼다. 집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공동묘지가 있었다. 공동묘지 산에 올라가는 길에 수정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LH공사가 지은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수정초등학교는 평거동으로 옮겼다. 평거동 들판도 수목에 자라고 온갖 야채가 재배되던 옥토였는데 아파트 숲이 되었다. 농사지을 좋은 땅은 남기고 개발하지, 후손들 생각은 전혀 안하는 개발업자들이 원망스럽다. 그리고 부모님을 평거동 동명고등학교 옆으로 집을 옮기셨다. 새 집을 지어 옮기기 전 자그마한 구멍가게도 했지만 도무지 그 구멍가게는 지금 생각해도 상식적이지 못했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장사에 대한 아무런 재능도 없고 안전이나 식품관리 등도 그야말로 시골 살림 그 정도였다. 우리를 아끼고 맛있는 음식을 해 주는 어머니와는 별도로 그 당시 집을 옮기는 바람에 내 정신세계가 안정되지 못한 것 같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고모집 밧데리사 직원으로 있다가 독립을 한다고 자금이 부족해서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사는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친하던 친구와는 이별이고 새 친구와는 영원히 서먹하고. 나는 평생 이 병을 앓고 있다. 40년 살던 아파트를 떠나야하니 나도 생각이 깊어지는 듯하다. 혼자 생각하는 병이 도지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