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이별이다. 오래된 내 책 들
나도 지금 유튜브를 꿈꾸는 게 있다. 퇴직하는 해 학교 도서관을 정리하면서 담당 선생님이 어린이용 한국 소설 전집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무심히 “선생님 하실래요?” 해서 그냥 망설임없이 건네받았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전집이었다. 그 책을 받고 나서 이 녀석들을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책읽기“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읽어 주는 책을 듣는 편이라고 하는 것을 대학 동창들에게 듣게 되었다. 출퇴근 길이나 일할 때, 읽고 싶은데 종이로 된 책을 읽을 여유가 없을 때, 듣는 책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국 소설읽기 유트브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계속 계획에만 머물고 있다. 책은 4, 6 배판 정도의 넓이로 내 큰 손안에 들어오는 느낌이 좋은 크기다. 하지만 연말에 집을 옮겨야 하고 10평 정도 줄여서 가야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첫 번째로 내 책을 줄여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책을 벌써 묶어 두었다. 딸의 “어머니 이 책 버리실 거죠?” 말에 단박에 대답했다. “아니, 가져갈 건데.” 딸은 말을 멈춰버렸다. 한 터럭을 버려도 줄지 않는 내 책 때문에 현재 살고 있는 43평의 아파트 방 한 칸을 책으로 채우고 옷 방도 거의 한 켠은 내 책으로 쌓여가고 있기 때문일 거다. 자꾸 쌓아놓는 내 성질 때문에 심리학을 전공한 딸은 급기야 병명을 내 놓는다. “ ? ” 이란다. 그 말을 들어도 할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저 물건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버리면 서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원로 교사나 작가 중에는 퇴직할 때 따로 책방을 갖거나 원래 서가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그럴 여유가 안된다. 집을 줄여서 이사를 가도 현재 사는 아파트가 너무 오래 되어 팔아도 가격이 이사가는 집의 절반 반에 안 되기 때문에 방을 구할 여력이 없다. 이 책들을 어떻게 하나 생각을 많이 했다. 근교에 부모에게 집을 물려받아 살지는 않고 별장처럼 사용하는 친구가 더러 있다. 농막으로 부모 집을 사용하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책을 좀 보관할까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또 생각한 곳이 막내 고모집이었다. 고모부가 안 계시고 고종사촌들은 결혼 후 다 독립하여 넓은 집에 혼자 사신다. 방이 두 개나 비어있고 거실도 넓었다. 고모께 전화를 넣었더니 두 말없이 그러라고 하셨다. 하지만 딸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집에 꽂혀 있는 책도 현재 보는 책 외엔 거의 읽지 않으니 고모집에 책 쓰레기를 가져가 놓는 것이라고 그건 아니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내 손에 들어왔다고 저 책들을 내가 끝까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선 보름날이나 절에서 태울려고 했으나 태우지 못한 사경 공책을 버리는 것이다. 절에서 태우지 않아도 이미 사경할 때 내 정성은 다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책들을 다 버릴 것이다. 우연히 『채식주의자』를 빌려달라고 말을 꺼냈는데 후배가 독서 토론한 책들을 달라고 한다. 남편과 자기는 가끔 카페에 가듯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면서 내기 읽은 책을 달라고 했다. 독서 토론 하는 책을 사서 읽다가 어느 때 부턴가는 딸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소각장으로 가다가 내 손에 온 이 소설책들은 보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들, 책 속의 이야기들을 내 손으로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담아서 세상에 내 놓고 싶습니다.” 소설 『나의 돈키호테』의 주인공이 돈키호테의 책과 오래된 지하 비디오 가게에서 자기의 일을 다시 시작하듯 나도 저 버려진 소설을 읽어 주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졌다. 48쪽에는 실제 유튜브를 개설하는 방법이 묘사되어 있다. LED 조명과 샷건 마이크는 코로나 시절 온라인 수업 때문에 집에 구비되어 있다.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자식들에게 물어봐야겠다. 동의해 줄지 모르겠지만.
‘다음으로 유튜브 채널 개설. 나는 유튜브에서 ’유튜브 채널 만들기 영상‘을 찾아보았다. 실로 간단했다. 먼저 구글 게정으로 로그인했다. 사용자 페이지에 들어가니 프로필 사진이 필요해 휴대폰으로 돈키호테 비디오 간판을 찍었다. 적당히 때묻은, 간판 끝이 부서져 형광등이 노출된 것마저 그럴듯해 보였다. 됐다. 다음은 채널 소개 글을 채울 차례였다.’
됐다. 나는 결심이 섰다. 이원수 아동 문학 전집과 꼭 읽고야 말겠다면서 아직 읽지 못한 오래된 책과 글을 써 주고 시청에서 받은 진주시사(晉州市史)와 수업에 필요한 자료들, 앨범 외에는 다 정리해야한다는 결심이다.
그래서 이젠 저 책들을 책장에서 내려서 한 권씩 제목을 읽어 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이별식을 할 것이다. 참 너희들이 내 손에 들어와 읽혔으나 나는 너희 가치만큼 가치있는 글을 아직 내놓지 못했구나. 그렇지만 포기하지는 않겠다.
김호연의 소설 『나의 돈키호테』의 돈 아저씨처럼 영원히 세상을 헤맬지라도 나는 돈이 되지는 않고 빛나지도 않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꼭 하고 말 것이다. 『나의 돈키호테』 속의 주인공 진산초가 53쪽에서 진산초의 방송은 돈아저씨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그를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고 밝혔듯 나도 시작하는 모든 일을 내가 버릴 책들에 대한 헌사라 생각하고 다시 읽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읽고 조용히 읽고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쓴 시처럼 이렇게 오래 살 것이다.
아버지 글자 공장
아버지, 전기불도 안 들어오던 어릴 때
잘 찢어지는 갱지에 줄을 그어 한글을 가르쳐 주셨지요
가갸거겨 평상에 앉아 달맞이 꽃이 팽그르르 핑 소리내며
국수 먹으라 부를 때까지 큰 키 허리를 구부리고 글자를 가르쳤어요
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해요
읽고 쓰고 글자는 모여서 낱말이 되고 낱말은 모여서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서 글이 되지요 노래를 불러요 뜻이 없는 글자도
모이면 의미가 생겨요
마술 같아요 무궁무진 낱말을 만드는 글자 공장
다 듣고 다 만질 수 있는 새털 같은 아기였는데
이젠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가르치던 가, 갸, 거,겨로 글자를 만들고 낱말을 만들고 문장을 만들고
저는 그 일이 왠지 천직인 것만 같아요 연필을 잘 깎아서 뾰족한 심으로 글자
한 자 한 자를 쓰면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한 자 한 자 곧바로 내리긋던
획이 떠올라요 판각하듯 종이에 아버지를 그려내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