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동료 교사들, 학생들, 학부모들... 33년간 쌓아온 인간관계의 90%가 교육현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솔직히 좀 두려웠다.
2029년, 내가 59세가 되면 이 모든 관계에서 한발 물러서게 된다. 아니, 어쩌면 완전히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누구와 어울리며 살아가야 할까?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어때, 기존 동료들과 계속 만나면 되지."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더라. 퇴직한 선배 교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 몇 년은 학교 소식을 궁금해하고 후배들과 만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긴다. 현직에서 겪는 고민과 은퇴자의 관심사가 점점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게 '교사 윤근관'이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학교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저는 교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고, 대화의 소재도 교육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이 정체성을 내려놓아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감을 갈구하는 존재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트라이브(tribe)'는 단순히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공통의 가치와 관심사를 공유하는 공동체다. 나는 지금까지 '교육'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트라이브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둔 지금, 새로운 트라이브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앞으로 20-30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데, 그 시간을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렇다면 은퇴 후의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 최근 몇 달 동안 이 질문을 놓고 고민해 봤다. 교사 윤근관이 아닌, 그냥 윤근관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한다. 특히 자기 계발서나 인문학 책을 읽을 때 희열을 느낀다. 트래킹도 좋아한다. 낮은 산에 오르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운동도 나름 취미가 되었다. 지금은 약간의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지만 배드민턴, 테니스 등의 동적인 운동을 좋아한다. 이런 관심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50대 중반이 되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게 때로는 어색하고 어렵다. 특히 처음 모임에 참여할 때는 "내가 여기 와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이미 형성된 관계 속에 끼어드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나이 차이 때문에 대화가 안 통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은퇴 후의 삶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트라이브를 찾는다고 해서 기존 관계를 모두 버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존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동료 교사들 중에서도 교육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관계는 은퇴 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과의 관계도 '선생님-학생'에서 '인생 선배-후배'로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건 관계의 성격이 바뀌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관계가 영원할 필요는 없다. 어떤 관계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요즘은 온라인을 통해서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배우고 있다. 독서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거나, 운동 관련 동호회 SNS 그룹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다. 물론 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관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하나 더 생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했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렇다면 은퇴 후의 새로운 관계는 단순히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새로운 트라이브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교사 윤근관'이 아닌 '인간 윤근관'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면서 동시에 설레는 일이다.
나와 같은 은퇴 준비자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첫째, 지금부터라도 교직 밖의 관심사를 키워보자. 취미든 학습이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보는 것이 좋다. 둘째, 용기를 갖고 새로운 모임에 참여해 보자. 처음엔 어색하지만,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된다. 셋째, 기존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자. 모든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지만, 의미 있는 관계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 넷째, 온라인 공간도 적극 활용해 보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도 가능하다.
33년간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의 정체성에 안주해 있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둔 지금, 새로운 트라이브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새로운 트라이브를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고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몇 년 더 이런 실험을 계속해서, 은퇴 후에는 교사 윤근관이 아닌 인간 윤근관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다.
새로운 트라이브 찾기는 단순히 은퇴 준비가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두렵지만 설레는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