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소하르의 기동대장이 나를 호출했다. “미스터 초이. 너 내일부터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으니까 당장 짐 싸서 여길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나는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Ⅰ. 아라비아, 미지의 세상을 향하여
Ⅱ. 신밧드의 고향에서 닻을 올리다
Ⅲ. 아랍 전사들과 형제가 되다
Ⅳ. 사막에 지는 태양
Ⅰ. 아라비아, 미지의 세상을 향하여
나는 씨름선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정쩡한 실력과 잦은 부상으로 한 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은퇴한 삼류 씨름선수였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열등감이 어린 날들을 지배했다.
운이 좋아 이른 나이에 순경 시험에 합격했지만 늘 남들보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진급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전국 경찰 유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인생이 스테이지마다 반드시 물리쳐야 할 ‘끝판왕‘이 있는 게임처럼 느껴졌다.
미션을 달성해도 게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레벨에 닿기 위해 난이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모두들 ‘즐겁기 위해’라는 게임의 본래 이유는 잊어버린 채, 오직 레벨업을 위해 지루한 전투를 반복하는 게임 중독자가 돼버린 것 같았다. 경찰 7년 차가 되던 해. 지방청 형사과의 막내로 근무하다 이른바 ‘현타’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선임들은 그쯤 되면 다들 한 번쯤 그런 순간이 온다고 했다.
나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한국으로 복귀한 뒤 이제는
‘될 대로 돼라.’며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만 경찰청 집회 시위 분야 치안전문가 파견’ 공고문을 발견했다. 심장이 요동치며 뛰었다. 복잡하게 널브러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단번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상처만 남았던 무도인으로서의 경력, 기동대 시절 어쩔 수 없이 도맡아 했던 교관의 경험, 그리고 도망치듯 떠났던 어학연수가 이제야 하나의 점으로 모여지는 것 같았다.
경찰청 면접과 실기 평가, 오만 경찰과의 영어 인터뷰를 마친 뒤 최종 5인에 선발되었다.
사전 준비 및 교육 등을 거쳐 실제 파견까지는 4개월이라는 지난한 시간이 추가로 소요됐다. 그동안 내 마음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과 환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사이를 마치 비트코인 차트처럼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Ⅱ. 신밧드의 고향에서 닻을 올리다
오만은 끝장나게 더운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이슬람 왕정 국가로, 사실 한국 사람에게 그리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었다.
면적은 남한의 세 배 정도지만(30만 9500m²) 국토 대부분이 돌산이나 사막인 터라 서울 시민 절반 정도의 인구(18년 기준 483만 명)가 살고 있다. 정치, 종교적으로 과격한 분쟁을 겪고 있는 몇몇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오만은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 종파 중 가장 온건하다는 이바디 파(순니파 계열)에 속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에 매우 관용적이다. 독특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중동의 스위스’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친절하고 평화로운 나라다. 하지만 2010년 튀니지에서 촉발된 반정부 시위운동 ‘아랍의 봄’ 영향으로 오만에서도 급여 인상과 일자리 창출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근대 경찰의 역사가 짧은 국가이다 보니 진압 과정에서 경찰관 다수가 부상당하고 민간인이 경찰 무기에 맞아 사망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오만은 영국, 프랑스 등 치안 선진국 경찰을 초청해 집회, 시위 관리 전술을 배워왔으며 한국 또한 2012년에 집회 시위 교관단을 오만에 파견하였다.
선배님들의 활약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놀랍게도 오만이 국가 경비 전술로 한국형 집회시위 관리 모델을 채택하기로 최종 결정하게 되었다.(프랑스 등을 다 제치고 말이다.) 게다가 이를 오만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각 지방 기동대에서 교육을 담당할 한국 교관들을 대한민국 경찰청에 추가로 요청한 것이다.
17년 6월. 드디어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했다.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과 모래바람이 피부에 닿으니 비로소 이역만리 타국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마침 이슬람 국가의 최대 명절인 라마단 기간이라 낮 동안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다. 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만에서의 첫 끼니를 신라면으로 때웠는데, 이렇게 머나먼 나라에도 한국인들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사실이 심심한 위로를 주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아랍인들은 성격이 여유롭고 관대한 대신 일처리가 매우 느리니 참고하라고 일러주셨다. 게다가 라마단 기간 동안 대부분의 관공서가 단축 운영을 하는 관계로 주민 카드와 은행 계좌를 만드는 데에만 보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됐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오늘은 정말 끝낼 수 있는 거야?” 우리의 투정 섞인 질문에 업무처리를 도와주던 오만 경찰 오마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인샬라~”(모든 것은 신의 뜻에 달려있어!)
오만 파견 대장 이한희 경감 등 기존 파견 경찰 셋과 새로 파견된 다섯이 모여 무스카트 기동본부에서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가졌다. 오만은 집회 시위 문화, 관계 법령, 경찰 시스템 등 모든 부분이 한국과 현저히 달랐다. 집회 시위의 ‘평화적’ 관리가 정착된 한국 경찰과 달리 오만은 무조건 ‘강하게’ 보이는 훈련을 선호한다고 했다. ‘한국식 훈련을 저들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막연한 불안감이 오티 기간 내내 공기 중을 떠다녔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우리는 4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한글로 ‘경찰’이라고 새겨진 진압 방패를 들고 중앙경찰학교의 신임 교육생들 마냥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 발령받은 근무지로 차례차례 흩어졌다. 내가 근무하게 된 ‘소하르’는 오만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대도시로 신밧드의 모험이 시작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또한 오만 반정부 시위 때 방화와 약탈이 발생하는 등 전국에서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인지라 간부들이 훈련에 각별히 신경을 쓸 것이라 했다. 시작부터 상당히 부담스러운 곳으로 가게 됐다. 모래색 지프차에 몸을 싣고 황량한 사막 사이를 뚫어 만든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앞으로 뻗은 길이 모래 먼지 탓에 뿌옇게 보였다.
함께 있던 동료들과 헤어져 이제부터 모든 걸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 생각하니 그저 막막한 두려움뿐이었다.
막상 소하르 기동대에 도착하니 그들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행정병이 당황한 표정으로 여러 군데 전화를 넣고 누군가와 한참을 통화하고 나서야 나를 기동대장이 있는 사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앗 살라말레이쿰”(신의 가호가 있기를) 수백 번 연습한 아랍어 인사로 소하르의 기동대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대장은 뜻밖의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그들이 권유하는 쓰디쓴 중동식 커피와 달콤한 대추야자를 주는 대로 받아먹다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수염이 덥수룩한 오만의 경찰 간부들 앞에서 어설픈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100명의 교육생과 한 달의 시간을 주신다면 한국식 경비 훈련을 소하르에 이식해서 더욱 우수한 부대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기동대장은 나의 거창한 포부를 듣고 나서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여기는 당장 근무 나갈 인원도 부족한데?”
사실 오만의 지방 기동대는 상시 훈련할 교육생이 대기하고 있는 수도 기동 본부와는 환경이 전혀 달랐다. 항상 인원 부족에 시달리며 수시로 근무에 동원돼야 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훈련을 진행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예를 들어 오늘 50명을 상대로 방패술 기본 동작 1일 차 진도를 나갔다면 그다음 날은 30명, 그 다음다음날은 또 다른 10명이 운동장에 나와 어리둥절하는 식이었다.
제대, 중대는 날마다 바뀌어 뒤죽박죽이 되었기에 대형 훈련은 때때로 기차놀이가 되곤 했다. 공들여 만든 훈련 계획표가 무색하게 하루하루는 제멋대로 흘러갔다.
게다가 먹고 자는 문제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깔끔한 고급 독채가 제공되는 다른 지역의 최신식 경찰 센터와 달리, 소하르 센터는 하필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탓에 관사가 너무 열악했다. 다섯 평 남짓한 썰렁한 원룸 안에는 색이 바랜 싱글 침대와 배탈 난 소리를 내는 미니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참 동안 비워둔 탓에 방문이 열리자 그곳에 터 잡고 살던 벌레들이 깜짝 놀라며 뛰쳐나왔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 두 박스가 개미 떼의 습격을 받아 일주일도 안 돼 폐기된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밤이면 바퀴벌레와 귀뚜라미가 구보하듯 방 안을 뛰어다녔고, 도마뱀은 은밀하게 천장에 달라붙어 밤새 나의 동태를 살폈다.
살충제를 뿌리며 직접 맞서 싸우기도, 고양이를 이용해 사냥에 나서기도,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살생을 금하고 빗자루로 쓸어 내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인해전술을 당해낼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결국 나는 쇼핑몰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텐트를 사 와서 적진 한가운데 나만의 벙커를 만들었다. 무더운 중동의 여름밤, 불 꺼진 운동장에 홀로 나가 수없이 방패를 휘두르며 훈련을 준비했다.
진이 빠진 채 텐트에 누워 아랍어 구령을 구시렁거릴 때면 멀리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의 오케스트라가 한참 동안 귓가를 간지럽혔다. 잠은 정말이지 쉬이 오지 않았다.
Ⅲ. 아랍 전사들과 형제가 되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휙 하고 지나갔다.
숨 막히는 더위도, 지긋지긋한 벌레와의 전쟁도 어느덧 익숙한 일상이 되어가던 무렵, 훈련 중에 기동대장이 급하게 나를 호출했다.
“미스터 초이.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 내일부터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다니까 당장 짐 싸서 여기를 떠날 준비를 해야겠어.”
어제까지만 해도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권하던 대장의 표정이 짐짓 무거워 보였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곧 한국 팀 파견 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에 무산담이라는 곳에 새로 경찰 기동대가 창설될 예정인데, 내가 특별히 너를 추천했으니 한 달 동안 훈련 좀 시키고 와라.” 칭찬인지 좌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훈련 인원이 무려 300명이 넘었다. 첩첩산중으로 오만의 경비국장이 센터 개소에 맞춰 친히 방문할 예정이니 훈련 시연회까지 준비해야 된다고 했다. 이제 좀 적응할만하다 싶었더니 또다시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대형 경찰 크루저를 타고 여섯 시간 동안 아라비아의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산담’은 오만의 영토지만 사실 본국과는 떨어져 아랍에미리트 내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도시로, 천연자원이 매우 풍부해 때때로 양 국간 영토 분쟁의 원인이 되는 곳이었다.
비유하자면 오만의 독도인 셈이었는데, 깎아져 내리는 절벽과 돌고래가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바다 덕분에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매력적인 관광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센터는 아직 공사 중이라 헬스장이나 매점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음료수라도 한 병 사려면 차를 타고 삼십 분 이상 가야 했기에 멍하니 방 안에 있는 것 말고는 도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휴대폰 신호가 잡혔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고, 티브이에서는 알자지라 방송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흘러나왔다. 커다란 소파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니 훈련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너무나 두려웠다. 고작 팀 회식의 건배사 따위에도 내 차례가 올까 봐 초조해하며 얼굴을 붉히는 내가 과연 머나먼 타국의 말도 안 통하는 경찰들을 능수능란하게 훈련시킬 수 있을까? 단상 위에 올라가 그 아득한 숫자의 인파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 경찰을 대표해 이곳에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었다. 먼저 오신 선배님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국의 진압 검열 영상을 눈에 박히도록 돌려봤다. 밤새도록 훈련 계획을 수정하며 혼자만의 씨름을 이어나갔다. 어깨가 무거웠다.
소하르의 능구렁이 경찰들과 달리, 무산담에 온 300명의 인원은 이제 막 경찰 시험에 합격하여 군기가 바짝 든 열혈 교육생들이었다. 훈련을 도와줄 오만 조교들 또한 수도 기동 본부에서 파견 나온 최정예 엘리트들이었다. 동트기 전부터 훈련생들의 구보 소리와 힘찬 기합이 센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훈련생들은 빡빡 깎은 머리를 하고 식당으로 걸어갈 때도 칼같이 오와 열을 맞춰 걸었다. 조교들이 어찌나 심하게 기합을 주던지 영화 실미도의 북파 공작 부대를 보는 것 같았다. 40도가 넘는 땡볕에서 쉴 새 없이 훈련을 하다 보니 교육생들이 갑자기 픽하고 쓰러지기도 했다. 깜짝 놀라 당황한 나와는 달리 오만 조교들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쓰러진 학생을 척척 들어 그늘로 옮기더니 다시 소리를 지르며 나머지 교육생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며 내가 조교들을 말려야 할 정도였다.
경찰 방패술, 체포술 훈련을 마친 뒤에는 한국식 집회 검열 시나리오를 참고한 연합 대형 훈련을 시작했다. 나의 명령에 따라 300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마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아랍어 발음이 바보 같다고 무시하면 어떡하지?’ 따위의 걱정은 어느새 무더운 열기 속에 증발해버렸다. 나는 아랍어, 영어, 심지어 한국어까지 동원해가며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때론 어르고 달래고, 웃고 떠들어 가며 뜨겁게 달구어진 운동장을 함께 뛰어다녔다.
다가오는 훈련 시연회를 준비하며 한국식 칼각을 보여주기 위해 300명이 서게 될 연병장 바닥에 자를 대고 일일이 위치를 표시했고, 늦은 밤에도 조명을 켠 채 땀 흘리며 훈련했다.
그리고 대망의 센터 개소식 날. 오만 경비국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무산담 기동대에 도착했다. 단단한 체구에 눈썹이 매우 짙은 남자였다.
“앗 살라말레이쿰 세이디, 위 아 레디 포 데몬스트레이션!”
(신고합니다. 훈련 시연회 준비!.)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한국식 거수경례를 했다.
경비국장은 오만식 경례로 화답했다. 곧 적막함이 깨어지고 300명이 동시에 함성을 내던지며 운동장으로 질주했다. 오와 열은 정확했고 동작은 절도 있었다. 한국 경찰의 진압 검열 못지않은 분위기였다. 반대편에서 시위대 역할을 맡은 인원들이 오만의 민속 노래를 흥얼거리며 등장했다. 한국식 기동 버스 대신 모래색 지프차에서 내린 오만 기동대원들이 한국 방패를 들고 밀집 대형으로 방어했다. 그야말로 케이 캅과 오만 캅의 완벽한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지켜보던 경비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손뼉을 쳤다.
뒤이어 다른 간부들의 박수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경비국장이 직접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마이크를 잡고 단상 위로 올라가 땡볕에 헥헥 거리는 교육생들에게 일장 연설했다.
“한 달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엄청난 일을 해낸 당신들이 자랑스럽다. 나는 한국 경찰을 대표해서 오만 경찰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오만 경찰은 한국 경찰이 받는 훈련과 똑같은 훈련을 마쳤고, 함께 땀을 흘렸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모두 한 가족이자 형제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와~” 하는 함성소리가 들렸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만약 불과 일 년 전의 나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는 늘 스스로가 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고, 남들보다 앞장서서 말을 할 수 있는 일은 타고난 소수의 몫이라고만 여겨왔다.
하지만 ‘도전’이라는 바다에 일단 던져지고 나니,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팔을 휘저어야 했고, ‘한계’라는 수면을 넘어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나니,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세상이었다.
Ⅳ. 사막에 지는 태양
오만에서도 어느덧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홀로 몇몇 지방 기동 센터를 전전하며 교육을 담당했다. 주말에는 광활한 산과 바다가 보이는 대자연으로 캠핑을 떠났고, 휴가 때는 배낭을 메고 남미와 아프리카를 떠돌아다녔다.
개인 사정으로 오만과 근무 계약을 한번 연장하게 되면서 원래 계획보다 일 년이 더 늘어났다. 게다가 복귀 직전에 터진 코로나 사태로 모든 항공기가 운행을 중단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총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어려운 일들이 따랐다.
계속해서 새로운 훈련을 요구하는 오만의 요청 탓에 정작 한국에서는 잘하지도 않는 한국식 훈련을 만들어내야 했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타국의 행정 절차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매너리즘에 빠져 처음의 열정을 점점 잃어갔다. 무엇보다, 가족과도 친구들과도 떨어져 오랫동안 교류 없이 지낸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열 명 남짓한 수준이었을 때 오만에서 하루에 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했다. 도시 전체를 봉쇄하고 통행 금지령을 내렸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함께 지내던 태권도 사범과 함께 기약 없이 격리되어 관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장을 보러 슈퍼라도 가려할 때면 매번 오만 간부와 지겨운 입씨름을 벌여야 할 정도였다. 매일 똑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똑같은 창밖 풍경을 보고 있자니 꼭 끝없이 재방송되는 티브이를 보고 있는 듯해 숨이 턱 막혔다.
오랫동안 이발을 못해 덥수룩하게 내려온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찔렀다. 더운 나라에서 제대로 숨을 쉬기가 버거웠는지 이마에는 붉은 여드름까지 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답답한 마음에 주방 가위를 들고 화장실 세면대에 섰다. 거울에는 푸석한 피부에 생기 없는 눈동자를 가진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는 내 몸에서 청춘이 조금씩 증발되고 있다고 느꼈다. 때로는 공동체로부터 이탈된 개인으로서의 본원적 고독을 온전히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버거웠다.
한국 복귀를 바로 한주 남겨두고 다른 파견 동료들과 함께 사막 캠핑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사막에 지는 태양을 눈에 담고 싶었다.
나는 레크리에이션용으로 챙겨갔지만 쓸 일이 없어 처박아두기만 했던 청, 홍색의 씨름 샅바를 처음으로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금빛 모래의 세상. 나와 동료들은 한바탕 씨름 시합을 벌이며 아이처럼 신나게 놀았다. 비록 천하장사의 꿈은 못 이뤘지만 아라비아 사막에서 샅바를 잡아본 최초의 씨름인은 천하의 이만기도, 강호동 장사도 아닌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하니 하하 웃음이 났다. 그즈음, 절대로 밤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로 맹렬히 타오르던 태양이 광활한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존재를 지워냈는데, 그럼에도 그것이 남겨둔 그림자가 한참 동안 대지를 붉은빛 여운으로 물들였다.
나는 우리의 헤어짐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떠날지라도, 우리가 오만에 머물다간 빛의 흔적이, 한국 경찰의 열정과 노력이 아라비아 사막을 오랫동안 황금빛으로 물들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양분으로 인해 오만의 집회 시위 문화가 언젠가 사막의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소망했다.
청춘의 끝자락, 짧지 않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도전과 경험들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현재의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저 인생이란 장편 드라마의 특별했던 하나의 시즌이 막을 내렸기에 이제는 잘 추억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만의 ‘인샬라’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은하수 사이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쉴 새 없이 별똥별이 쏟아져 내렸다. 모두 사막의 마법에 이끌린 듯 모래 위에 드러누워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았다.
들뜬 흥분 틈새로 슬그머니 벅찬 감동이 스며들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사막의 별을 이불 삼아 잠드는 순간이 다시 한번 올 수 있을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나간 모든 순간순간이 너무나 아쉬웠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現) 대구청 대구중부서 중앙파출소
09년 순경 공채 입직, 대구청 3기동대, 인천청 1기동대, 인천청 유도선수단 및 체포술 교관), 오만경찰청 집회시위 교관 파견(’17.5월~’20.11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