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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찰청 Oct 20. 2022

# 13. 카불의 잠 못 드는 신호등

前)주아프가니스탄대사관 경호주재관 경위 유동진*

사나이 한 목숨 나라를 위해...

      




Ⅰ. 아프간 생활의 서막,“노란불”이 시작되다.  

Ⅱ. 험지에서 완벽한 경호 임무수행 “파란불”

Ⅲ. 아버지의 죽음과 코로나-19 감염 “ 빨간불”

Ⅳ. 수도 카불, 탈레반 점령“점멸등”

Ⅴ. 바라며



. 아프간 생활의 서막, “노란불이 시작되다

  

해외 파견이라는 생각은 평소에 크게 해보지 않았다.

2006년 군 시절 이라크 자이툰 사단 파병의 힘든 경험을 통해 파병지에서의 폐쇄된 공간에서 오는 반복되는 삶의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특공대 선배의 권유와 함께 해외 파병 기억도 10여 년이 지나니, 한 번 더 경험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사격 및 체력 등 치열한 선발 시험을 열심히 준비해서 차례로 통과하였다. 최종 선발되는 순간까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이 잘하는 선택일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결론은 누군가는 임무 수행을 해야 하고  국위선양이라는 사명감이 나의 선택을 이끌었고 그렇게 나의 해외 파견 생활은 시작되었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기내 밖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풍경이 보였다.

나무가 없는 황무지 산과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관련 영화에서 보았던 흙으로 만들어진 집들과 민락 가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 카불은 그래도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카불 공항은 군사 공항과 같이 운영돼서 그런지, 정찰기, 군 공격헬기, UN 수송기, 민간 구호단체 헬기 등 전쟁지역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카불 공항의 시설은 국제공항이라는 느낌보다는 어릴 적 탔던, 철도청의 비둘기호 열차의 영등포역 정도로 빈약했다. 며칠 전 카불 공항에 폭탄 테러가 있었다고 해서 긴장감이 가득했지만, 명색이 특공대 출신이라 내색도 못 하고 태연한 척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도시 전체는 무장한 현지 군인과 경찰 그리고 정보부대 요원들로 3중 검문이 시행 중이었고 대사관까지 가는 길 중간에 미군기지와 미국 대사관이 보였다.

      

. 험지에서 완벽한 경호 임무수행 파란불      


1주일이 지나, 외교부 본부에서 실사단 2명이 도착했다. 미군기지 VIP 방문을 마치고 저녁 아프가니스탄 고위급 저택을 방문하였는데, 카불 동쪽 “UN 그린빌리지”라는 구역에서 탈레반 테러 용의자들이 정화조 트럭에 폭발물을 가득 싣고 카불 중심부로 들어오다 발각이 되어 현지 경찰 및 군인들과 교전 중 차량에 폭탄을 터트렸다. 그 폭음과 진동의 여파로 20km나 떨어진 대사관이 흔들렸다.


기지 초소에 용역 방호 인력을 배치하고 외부 경호를 나갔던 인원들이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인솔하고, 경호 인력과 대사님을 포함한 전 인원이 무사히 돌아왔지만, 실사단 중 한 분은 이동 중에 얼굴에 부상을 당해 그다음 날 수술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2~3일 후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외교부 실사단을 공항까지 경호했다. 실사단장님께서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엊그제 폭발 사건 때문인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심히 임무 수행하고 오라고 격려를 해주었는데, 카불 공항 주차장에서 보았던 그 측은한 눈빛이 아직도 선하다.     


카불은 해발 1,600M 고지대여서 평상시에도 숨이 조금 가쁘다. 이런 증상에 적응하는데 두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평소 특공대에서 체력단련 및 운동을 많이 했는데도,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찼다. 대사관 외부 경호 행사는 K-1 소총과 독일제 P-7 권총으로 이중 무장을 하고 현지 경호 요원의 AK-47로 무장하여 특수 제작된 방탄 SUV 차량으로 주 2~3회 경호 임무를 나갔다. 카불의 도로는 신호등이 없고 보일 듯 말 듯 한 중앙선 그리고 곳곳에 현지 교통경찰들과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대사관 경호 차량에 미상의 민간인이 접근을 하면 차량 테러를 의심하며 긴장도 많이 하고, 높은 건물 사이를 지나갈 때는 매복된 스나이퍼가 있는지 신경이 쓰였지만, 4개월 동안의 수많은 경호 경험으로 주변 환경과 경호 임무에도 익숙해져 갔다.


대사관에서 카불 및 지방도시에 거주하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21대 대한민국 총선 재외국민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기간 10여 명의 교민분들이 대사관까지 안전하게 이동하실 수 있도록 신변보호 활동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자긍심을 갖고 생활하시는 교민 분들의 안전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하루는 대사관 직원들과 운동을 하다가 영사님이 넘어져서 우측 손목이 꺾이는 복합 골절이 났다. 재빨리 응급 처치하고 미군기지 출입을 위한 카드를 챙기고 차량에 태워서 곧장 미군 기지 의무대로 갔다. 평소 경호 임무 시 의무대를 눈여겨보아서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올 수 있었다. 미군기지에는 진단할 수 있는 X-레이 장비가 없어 엉덩이에 모르핀 2방을 맞고 골절 부위에 부목을 대고 인접 미국 대사관 응급센터로 이동하였다. 상호 교류시스템이 되어 있었고 미국 대사관은 역시, 천조국의 위력인가? 한국대사관과 비교하여 크기가 20배 정도는 큰 것 같고 시설 및 규모가 달랐다. X-레이 판독 결과 복합 골절로 뼈를 원상태로 맞추고 수술을 위해, 다음날, 더 큰 병원인 미군 바그람 병원으로 헬기 후송을 한다고 하고 예약을 하고 대사관으로 복귀를 했다.      


. 파견 근무 중 아버지의 죽음 빨간불     


해외 파견 근무 전, 아버지가 방광암으로 치료를 받으셨는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셨다. 첫 번째 휴가 때 얼굴을 뵙고 쾌유를 간절히 원했으나, 암이란 병이 희한한 게 전이가 되니 하루하루 그 병세가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휴가 때, 서울 보훈병원에서 아버지를 보았을 때, 내 목소리만 알아들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자식이 해외 임무 중 복귀할 때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기다리고 계셨을까…. 괜히 해외파견 근무를 나가서 아버지를 끝까지 고생시켜 드린 거 같고 내 모습을 보려고 한국에 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신 아버지께 감사함과 죄송함과.. 존경스러움과 만감이 교차했다..


나의 아버지는 내 인생의 멘토였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였고 언제나 든든한 나의 버팀목이셨다. 아직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듯이 슬프다.     


3일 후,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장례를 치르고 다시 카불로 복귀를 했다. 대사관 직원들의 위로를 받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개월 동안 저녁에 숙소 침대에 누우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슬픈 감정을 잊으러 일부러 운동도 많이 하고 위험한 지역의 경호 임무를 자처하며 바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도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아버지 따라서 나도 갈까, 하는 생각으로 위험한 경호 임무를 자처했던 것 같다.


야간에 빛나는 달빛을 무심코 보면 저곳에 아버지가 고통 없이 계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매일 저녁 6시쯤 카불 시내에 울려 퍼지는 이슬람 기도 육성 사이렌 소리는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고 사후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 수도 카불, 탈레반 점령점멸등     


 지방 외곽 도시부터 점령하기 시작한 탈레반의 공세는 탄력을 받아 수도 카불을 조여왔다. 이에 대사관에서는 카불 및 지방도시에 있는 교민들의 철수를 권고하고 안전한 복귀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카불 공항은 탈출하는 현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큰 짐을 이고 지고 떠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지만,

마지막 1명의 교민까지 안전히 한국행 비행기로 모시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교민이 모두 떠난 카불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한 층 더 짙어졌다.


8월 14일 두바이 출장을 마치고, 카불로 복귀하는 비행기에는 평소 200여 명이 탑승하던 기내에 8명만 탑승을 하였다. 영국 및 프랑스 종군기자 6명과 지금 생각해 보면 탈레반 주요 요원으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1명, 1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외국에서 거주했고 다시, 본국으로 간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지금 예측이 든다. 그리고 동양인 남자, 바로 나였다.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과 조속히 복귀하라는 통보를 받고 도착한 카불 공항 주변에서는 검은 연기가 났다. 카불 공항 상공을 2시간가량 선회했지만 비행기는 다시 두바이로 회항을 했다. 종군기자를 통해 카불이 탈레반에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불 공항 활주로에 창륙까지 했었는데..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틀간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거의 국제미아 신세로 지내며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주시했다.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직원들과 경호단 잔류 인원들은 카타르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 역시 한국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 바라며     


한 달 동안, 뉴스를 도배하는 아프가니스탄 소식은 남의 일 같지 않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래 비행기에 오르다 떨어져서 죽고 폭탄 테러로 미군들이 사망하고 전직 아프가니스탄 경찰 또는 군인 고위급들이 탈레반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내는 동안 만났던 지인이거나 자주 마주쳤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2년 동안 지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청명한 하늘과 때 묻지 않은 시민들의 순수함을 보면서 전쟁이 없는 나라였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겨울은 한국보다 춥지 않고 여름은 한국보다 덥지 않았던.. 그리고 어린양들처럼 순수했던 아이들, 시민들과의 추억이 있는 내 마음속 제2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평화가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바란다.


마지막으로 파견 기간 동안 긴장의 끈을 같이 나누었던 삶의 동반자 류부열 단장님과 고광윤 선임팀장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 現)전남청 경찰특공대 전술팀장

  2009년 경찰특공대 특채 입직, 광주경찰특공대, 경기북부경찰특공대,

주아프가니스탄대사관 경호주재관(’19.8월~’21.9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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