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찬가

그들은 또다시 판자촌을 형성하며 삶을 이어갔다.

by 이광주

광화문에서 혜화동 지나 돈암동에 이르면 발길을 멈추고 싶다. 미아리 고개를 넘기 싫어서다. 그리 높지도 않은 고개는 미아리를 가난한 동네로 갈라놓았다. 미아리 고개는 북악산에서 동남쪽을 향해 뻗어 내려오다, 아리랑고개를 지나 돈암동과 경계를 이루며, 안암동 뒷산에 이르는 능선의 중간부에 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대중가요로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6·25 전쟁 중에는 북한군 탱크와 맞서 수도 서울을 지키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고개요. 9·28 수복 땐 수많은 애국인사가 쇠사슬에 묶여 북으로 끌려간 한 많은 고개다. 역사적 사연만큼이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전국 각지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은 미아리로 몰려들었다. 집 지을 땅 한 평 없는 그들은 산비탈을 깎아 하나둘씩 천막을 치고, 벽돌을 쌓아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동네가 만들어졌다. 그나마 일찍 상경한 사람들은 산 아래쪽 평지를 차지했고 뒤늦게 상경한 이들은 점점 산 위쪽으로 가야 조그만 터라도 잡을 수 있었다. 도시계획이나 관청 허가 없이 살기 위해 억지로 형성된 동네다. 그곳은 나무와 풀 대신 가난이 자라고 늙어가며 더는 오를 곳이 없는 사람들이 뒤엉켜 사는 곳이 되었다.

사람 하나 겨우 비집고 지나갈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 산동네는 흡사 ‘모로코 고대도시 페즈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길을 연상케 했다. 미아리 고개 넘어 시작된 판자촌은 길음동, 정릉동, 삼양동, 미아동에서 하월곡동까지 성북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계획 없이 산비탈에 지어진 집들이라 식수 조달이 가장 어려웠다. 맨 아랫동네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집집이 물지게를 지고 골목길을 한참 내려와 수도 집에서 몇 원의 물값을 주고 물을 사 갔다.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라 물지게나 물동이를 이고 나르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정릉 4동 사람들은 공동수도 대신 북악산 계곡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경우도 많았다. 산동네를 대상으로 물을 길어다 파는 물장수도 생겨났다. 여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빨래 거리를 머리에 이고 북악산이나 정릉천 상류 청수장 근처 계곡물에서 빨래하는 것이 중요 일과 중 하나였다. 빨래가 어렵다 보니 옷에 ‘이’가 생기고, 머리에는 ‘서캐’가 실어 양지바른 곳에 앉아 이를 잡아주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급한 대로 지어진 판자촌이라 하수처리 시설이 없었다. 생활폐수는 자연스레 만들어진 실개천 따라 정릉천으로 흘려보냈다. 여름이면 악취와 모기로 고역을 치렀다. 그래도 정릉천은 미아리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다. 여름철 장마는 쌓였던 오물을 북악산에서부터 말끔하게 씻어내려 정릉천을 정화해 놓았다.

천변은 어린이들의 좋은 놀이터다. 조그만 공터만 있어도, 축구도 하고 보름이면 쥐불놀이도 했다. 여름이면 어른들은 천변 낡은 평상에 모여, 판잣집 루핑 지붕에서 품어 내는 열기를 피하곤 했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웅덩이에서 썰매 타고, 팽이 치며 추위를 이겨내는 곳이기도 했다.

늦가을이 되면 그곳 사람들은 구공탄을 장만하고 옮기는 것이 김장만큼이나 중요한 겨울나기 준비다. 좁은 골목길로 이어진 산동네의 연탄운반은 오직 지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값이 비쌌다. 운반비를 줄이기 위해 온 식구가 동원되어 머리에 이고, 등에 지어 수백 장을 옮겼다.

겨울이 되면 좁은 골목길은 연탄재가 차지했다. 미끄러운 길에 연탄재가 요긴하게 쓰이긴 했지만, 집집이 쏟아내는 연탄재는 옆집과 다툼으로 이어져 골목 안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벽돌로 엉성하게 지은 판잣집은 연탄가스에 취약한 구조였다. 한 해 겨울이 지나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거나 마비되어 신체장애인이 많이 발생하는 곳도 미아리였다.

무작정 상경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공사판 막일이나 채석장 석공, 그도 안 되면 징을 울려대며 “뚫어 뚫어”를 외치며 굴뚝 청소를 하고, “똥퍼 똥퍼”를 외치며 똥장군을 지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아낙들은 길옆에 앉아 푸성귀 몇 잎 갖다 놓고 장사를 했다. 길음 시장과 미아 시장은 그들이 모여 생계를 꾸려가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삶에 여유가 없다 보니 시장통에는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자리다툼, 술주정뱅이 술값 시비, 먹고살기 힘든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삶의 여유가 없었다.

서라벌 예술대학(현 서라벌고교)에서 하월곡동에 이르는 정릉천 변 양쪽에 왕대포집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니 경쟁이 과열되면서 몇몇 집에서 얼굴 반반한 색시를 두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색싯집 소문이 장안에 퍼지면서 서울의 난봉꾼들은 미아리로 모여들었다. 장사가 번창하면서 색시 촌이 형성되었다. 술집은 매춘으로 변질하여 집집이 쇼윈도를 설치하고 한복 곱게 차려입은 매춘부 십여 명씩 앉아 손님을 유혹하는 속칭 ‘미아리 텍사스’가 형성되었다. 매춘에 동원되는 여자들은 대부분 빚을 떠안고 팔려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했다. 밤에는 매춘에 동원되고, 낮에는 밖에서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서 갇혀 지내는 막장의 삶을 연명하는 어둠이 미아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에게 유일한 문화공간인 미도 극장이 있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철 지난 영화이긴 하나 2편 동시 상영 극장이라 주말이면 만원이라 통로에 앉거나 뒤에 서서 봐야 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간혹 극장에서 쇼 공연을 하는 날이면 길게 줄을 서서 표를 사려는 모습에서 그들의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산동네에 불어닥친 재개발계획은 서울의 꿈을 무자비하게 부숴버렸다. 수백 명의 철거용역 깡패를 동원하여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내 집을 지키려는 산동네 사람들과 철거 깡패와의 싸움은 죽고 사는 전쟁이었다. 깡패들은 쇠망치, 곡괭이,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무자비했다. 그곳 사람들도 대응에 나섰다. 가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설치하고 망을 섰다. 철거 단이 나타나면 망루에서 징을 울렸다. 대항할 젊은 사수대가 돌멩이, 야구방망이, 쇠꼬챙이로 무장하고 맨 앞에서 전투를 벌였다. 부녀자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돌멩이를 공급하며 판자촌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서울의 대부분 산동네는 무허가로 지은 집이라 아무런 재산적 보호를 받지 못해 더 강렬하게 저항했다.


결국, 그들은 경기도 성남의 산동네로 강제 이주해 또다시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해 삶을 이어갔다. (사진 lee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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