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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방황

뒤늦은 방황을 겪으며

     

  2019년 2월, 모든 게 낯선 모델의 세계에 첫걸음을 뗄 때는 몰랐다. 막연히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 붙잡고 첫걸음을 뗐을 뿐 이 걸음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내 존재와 삶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모델의 세계를 기웃거린 지 4년여의 세월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지나온 여정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도전과 모험의 여정이면서 동시에 방황과 번민의 여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모델의 세계에 들어가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 경험하는 것들뿐이었다. 마주하는 사람, 마주하는 장소, 마주하는 일, 마주하는 언어, 마주하는 SNS, 마주하는 학습 등이 다 처음 보고 경험하는 것들이어서 무척 생경하고 낯설었다. 그런데 생경하고 낯선 세계여서인지 ‘처음’이 주는 감동과 설렘이 있었다. 이번 촬영은 어떻게 진행될까, 어떤 사진작가와 작업할까, 촬영한 작품이 어떻게 나올까, 어떤 옷을 입게 될까, 어떤 반응이 있을까, 등등 염려 섞인 기대를 하게 되고,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처음’이 주는 설렘과 희열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때마다 삶에 활력이 생기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삶이 고무되고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모델의 세계를 기웃거린 시간은 방황과 번민의 여정이었다. 1달, 2달이 아니다. 1년, 2년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4년 가까이 계속 방황하고 번민하는 내적 갈등의 연속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애당초 나의 꿈은 모델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델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짧은 시간에 모델의 길을 두 번 포기했고, 포기했을 때 아쉬움 같은 건 일절 없었으니까. 또 멋지게 성공한 모습을 상상해봐도 그 성공이 그렇게 자랑스럽거나 뿌듯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모델의 길을 걸으면서도 틈만 나면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공부했지, 에이전시를 찾아다니며 홍보하거나 인맥을 쌓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모델이라는 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쉼 없이 공부하며 발견한 삶의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멋지고 성숙한 시니어 문화를 일구어보고 싶었고, 평생 추구하며 달려온 삶의 지향성(근원 진실)과 맞닿으면서도 다양성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싶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어디를 봐도 이런 뜻을 공유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뜻밖에 만난 K 대표가 그런 사람이겠다 싶어 함께 했고, 함께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공유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2년 6개월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끝없이 방황하고 번민하면서도, 나는 왜 모델의 길을 가려하는가, 모델의 길을 가는 것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삶의 지향성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과 씨름하면서도 공유의 가능성을 보았기에, 마음과 뜻을 공유할 수 있겠다는 한 가닥 가능성을 차마 놓을 수 없었기에 비틀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수 있었다. 



  정말 끝없이 번민하며 방황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한 적이 많았고, 마음으로 모델의 길을 포기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까지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변덕스레 방황하는 나를 보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방황이 아름다운 방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번민과 방황으로 인해 내가 무너진 게 아니라 오히려 풍성해지고 단단해졌으니까. 처음 품었던 희망, 즉 평생 추구하며 달려온 삶의 지향성(근원 진실)과 맞닿으면서도 다양성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싶다는 희망이 작으나마 이루어졌으니까. 모델의 길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넘지 못했을 경계를 많이 넘었으니까.     

 

  앞에서도 몇 번 말했다시피 나는 평생 교회 안에서 살았다. 책 속에서 살았다. 세상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다양하게 읽기는 했으나, 그렇더라도 책을 통해 세상을 읽고,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본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책과 교회를 넘어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본다. 세상과 손을 맞잡고 세상을 걸어간다. 모델의 길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맛보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맛보면서 이전에 살아왔던 자리, 살아왔던 방식, 살아왔던 생각을 넘어가고 있다. ‘처음’의 희열과 ‘새로움’의 생기발랄함에 용기를 얻어 삶 속으로 유쾌한 걸음을 떼고 있다. 끝없는 번민과 방황 덕분에 모델의 길을 가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사건들을 경험하고, 경계들을 넘어서며 광대한 삶 속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다. 끝없는 번민과 방황 덕분에 경계 너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삶의 다양성을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60대에 뒤늦은 방황을 하며 깨달았다. 방황이 아름다운 것임을. 방황이 새로움의 길임을. 방황은 10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님을. 진짜 방황은 60대에 해야 함을. 생각할수록 정말 그렇다. 방황은 10대의 전유물일 수 없다. 진정한 방황은 오히려 60대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살아왔던 익숙한 자리, 그동안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 그동안 살아왔던 익숙한 생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10대 시절보다 더 깊고 진한 방황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결국 경험의 깊이요 경험의 총량일 테니까. 방황한 만큼 인생과 세상에 대한 해석이 깊어지고 풍요로워질 테니까. 

  하여, 방황이 고맙다. 특히 60대에 방황하게 된 것, 모델의 세계를 기웃거리다가 심히 방황하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방황은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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