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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주기

인생 여정의 3단계

     

  지금 내 서재에는 그 책이 없다. 제목이 하도 독특해서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그 책은 다양한 경력을 가진 작가 로버트 풀검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이다. 물론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30여 년 전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읽었다는 느낌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도 경험하고, 인간과 세상의 복잡 미묘함에 끝이 없다는 것도 좀 이해되자 로버트 풀검이 쓴 책 제목이 거슬렸다(그 책을 버린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 저자가 그 책을 통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책 제목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 짐작되는 바가 없진 않으나 인생을 너무 단순하게 봤다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누구도 배움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우주는 광대하고 복잡 미묘하다. 우리가 오늘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좌충우돌하며 사는 것은 배움에 끝이 없고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난 말과 글의 천재 이어령도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기 인생은 한 마디로 물음표(?)와 느낌표(!)로 가득한 삶이었다고 말했다. 나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물음표와 느낌표가 내 인생을 추동해온 원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음이 있어서 쉼 없이 공부할 수 있었고, 쉼 없는 공부를 통해 거짓의 감옥에서 진실의 땅 · 자유의 땅으로 해방될 수 있었고, 해방의 희열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옳다. 물음표(?)와 느낌표(!)야말로 가장 순수한 삶의 동력이다. 인간은 물음표로 인해 살고 느낌표로 인해 사는 아주 독특한 존재다. 인간은 단지 살지 않는다. 그냥 마구잡이로 살지 않는다. 모종의 지향성을 갖고 산다. 양지 식물이 태양을 지향하듯이 인간은 의미 지향성, 가치 지향성, 생명 지향성, 사랑 지향성, 앎 지향성, 완전 지향성 등을 향해 산다. 지향성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람마다 지향성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내가 모델의 길을 가며 끝없이 방황한 것도 바로 이 지향성 때문이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성과 모델의 길에 요구되는 지향성 간의 차이 때문이었다.      

  삶의 지향성은 하루아침에 형성되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뼈아픈 실패와 끊임없는 학습을 반복하면서 단계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한다. 생애 주기를 따라 삶의 지향성도 함께 변화하고 발전한다.      


  나는 인간의 생애 주기를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구분한다.      


  배움의 단계 

  노동의 단계 

  존재의 단계      


  모든 인간은 이런 단계를 거쳐 산다. 그리고 사는 단계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 내용을 압축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배움의 단계 : 학습의 시기(20-30년)-삶 준비기–의존의 시기–상대가 주체-나와 세계가 미분화 

*노동의 단계 : 노동의 시기(20-30년)-삶 분투기–독립의 시기–내가 주체-나와 세계가 분화

*존재의 단계 : 삶의 시기(20-50년)-삶 향유기–상호의존의 시기–우리가 주체-나와 세계가 하나     


  압축한 것을 풀어보자. 인생은 매우 웅대한 것이어서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조금이라도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에 네 가지 관점에서 풀어본다.

 

 첫째, 인생을 삶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학습하는 시기, 즉 삶 준비기라 할 수 있다. ‘노동의 단계’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뚫고 살아내기 위해 노동하는 시기, 즉 삶 분투기라 할 수 있다. ‘존재의 단계’는 일이나 성과보다는 삶의 은총에 눈뜨고 삶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삶의 시기, 즉 삶 향유기라 할 수 있다. 


  둘째, 인생을 관계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살기 위해 부모나 사회의 돌봄에 의지해야 하는 의존의 시기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부모나 사회의 돌봄으로부터 독립해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독립의 시기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만유와 만인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상호의존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셋째, 인생을 삶의 주체가 누구냐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자기가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한 상태, 즉 상대방이 주체인 상태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상대방이 주체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가 삶의 주체인 상태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자기의 주체됨을 넘어 서로의 주체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서로 주체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넷째, 인생을 나와 세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배움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마구 뒤섞인 미분화의 시기라 할 수 있고, ‘노동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따로따로 인 분화의 시기라 할 수 있고, ‘존재의 단계’는 나와 세계가 뒤섞이거나 따로인 것을 넘어 서로가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아는 조화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생애 주기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관계를 맺는 형식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그런 만큼 배움의 단계에 살던 방식으로 노동의 단계를 살아선 안 되고, 노동의 단계에 살던 방식으로 존재의 단계를 살아선 안 된다. 생애 주기마다 그 단계에 걸맞은 삶의 내용과 방식을 좇아 살아야 한다. 즉 배워야 할 때는 배워야 하고, 일해야 할 때는 일해야 한다. 놀아야 할 때는 놀아야 하고 독립해야 할 때는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 건강하고 풍성할 수 있다. 


  물론 배움의 단계에서만 배우는 것 아니고, 노동의 단계에서만 일하는 것 아니다. 노동의 단계를 살면서도 열심히 배워야 하고, 존재의 단계를 살면서도 쉼 없이 배우고 일해야 한다. 왜냐면 상위 단계는 하위 단계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직 품으면서 넘어가는 법이니까.    

  

  또 생애 주기마다 그 단계에 요청되는 삶을 충분히 사는 게 좋다. 배움의 단계를 건너뛰어도 안 좋고, 노동의 단계를 건너뛰어도 안 좋다. 존재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노동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도 안 좋다. 배움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더욱 안 좋다. 사람은 모름지기 배움의 단계와 노동의 단계를 거쳐 존재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배움의 단계나 노동의 단계와는 차원이 다른 시선으로 나와 너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좋은 인생, 건강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암튼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생애 주기별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는 것. 생애 주기별로 삶의 내용이나 지향성이 변화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생의 세 주기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 


  옳다. 인생의 세 주기는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앞의 두 주기(단계)는 마지막 세 번째 주기를 위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인간이 배우고(학습의 단계) 일하는(노동의 단계) 이유가 무엇인가. 삶(존재의 단계)을 위해서이지 않은가. 돈, 명예, 권력, 인기, 집, 건강을 생각해보라. 이런 것들이 삶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돈이 삶을 부패하게 한다면 그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건강이 삶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건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직 삶에 이르는 돈만이 의미 있고, 삶에 이르는 건강만이 의미 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의 꽃봉오리는 단연 삶이다. 지식, 일(직업), 돈, 명예, 권력, 인기, 집, 건강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꽃봉오리는 아니다. 오직 삶만이 꽃봉오리다. 오직 삶에 이른 것만이 꽃봉오리다. 그리고 삶의 신비에 눈뜨고 삶의 진미를 아는 인생의 꽃봉오리는 존재의 단계에 가야 비로소 피어난다.      

  흔히 배움의 단계에 있는 청춘의 때를 일컬어 인생의 황금기요 꽃봉오리라고들 하는데, 이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생각이다. 삶을 준비하는 배움의 단계나 독립적 주체로서 일하는 노동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하다 해도 아직 인생의 꽃봉오리에 이른 것 아니다. 대학 수능 시험에서 전국 1등을 했어도 아직 인생의 꽃봉오리에 이른 것 아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어도 아직 인생의 꽃봉오리에 이른 것 아니다.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는 자신의 100년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인생의 노른자위가 65세에서 75세였다고 회고한다. 그때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어느 신문 기자가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나이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에도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때는 생각이 얕았고 행복이 뭔지 몰랐다’며 ‘60세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다. 과연 100년을 산 철학자답다. 존재의 단계를 살아온 사람답다. 

  예수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진다.”(고린도후서4:16)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한 편지에서 “나의 노년은 피어나는 꽃입니다. 몸은 이지러지고 있지만 마음은 차오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채로운 삶을 살다가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작가 이어령도 자기 정신은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 EVER GREEN이라고 했다. 95세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 죽은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자기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75-85세였다고 회고했다. 

  미국 월간지 <선샤인>이 의미 있는 통계를 발표했다. 세계 역사상 의미 있는 업적을 성취한 나이대를 조사해보니 35%는 60-70세에, 23%는 70-80세에, 6%는 80세 이후에 성취했다는 것이다. 전체를 합하면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후에 성취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60세 이후(은퇴 이후)의 시간을 덤으로 주어진 여가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삶의 무대 뒤편에서 어슬렁거리는 권태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럭저럭 보내도 괜찮은 잉여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은퇴 이후의 삶은 결코 덤일 수 없다. 덤이기는커녕 오히려 인생의 꽃봉오리다. 진짜 자기를 찾고 자기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삶의 알짬이다. 은퇴자 또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잉여 인간일 수 없다. 은퇴자는 비로소 인간으로, 비로소 자기로 살아가는 삶의 주인공이요 온 세상을 위해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요원이다. 


  그런 만큼 당신이 은퇴했든, 은퇴를 앞두고 있든, 은퇴가 저 멀리 있든 은퇴 이후의 삶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구멍 난 헌 고무신짝 대하듯 해서도 안 된다. 은퇴자를 잉여 인간 취급하면 안 된다. 그것은 죄악 중에 가장 큰 죄악이요 착각 중에 가장 심한 착각이다. 왜냐면 모든 인생은 은퇴 이후를 향해 사니까. 은퇴 이후야말로 인생의 꽃봉오리이니까. 특히 100세 시대의 은퇴는 이전의 은퇴와 무게나 차원이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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