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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광고를 찍으며

최근에 찍은 안경 광고 중 한 컷



나는 평생 한 가지 일만 했다. 아니 한 가지 일조차도 제대로 못 해 헉헉거렸다. 여러 재능을 타고나지도 못한 데다가 번잡하고 복잡한 걸 싫어해 이것저것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않고 단조롭고 단순하게 살아왔다. 가까운 친구 중에 타고난 멀티플레이어가 있는데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며 사는 걸 볼 때면 경이롭기도 하고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내가 나이 60이 넘어 N잡러가 됐다. 요즘 대세라는 N잡러. 그것도 목사와 패션모델. 완전히 딴 세상 같은 두 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일을 하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 지금의 내가 꼭 그렇다.   

    

모델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다. 그동안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저기서 불러줘 광고를 쪼끔 찍었다. 패션화보에서부터 자동차, 운동화, 금융, 안경, 뮤직비디오, 공익광고까지.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다. 모두가 난생처음 마주한 일, 난생처음 마주하는 일들이었다. 당연히 어렵고 낯설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이 신선하고 유익하고 활력 충전이 됐다. 최근에 안경 촬영을 앞두고도 기대 반 호기심 반의 설렘이 있었다. 어떻게 찍을까? 어떤 포즈를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떤 안경을 쓰게 될까? 어떤 사진이 나올까?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등등 설렘이 있었다. 20대부터 줄곧 안경을 써왔는데도, 살아온 세월이 적잖은데도 가슴 설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뭐가 됐든 처음은 다 그런 것 같다. 남여노소와 상과없이 누구든 처음 앞에 서면 설렘, 기대, 상상, 호기심이 생기발랄해지는 것 같다. 누구든 처음을 마주하게 되면 그 경험이 너무도 신선하고 놀라워서 깊고 강렬하게 지각되는 것 같다. 무릇 첫 만남, 첫 여행, 첫 출근, 첫 출산, 첫 연애, 첫 작품, 첫 수상이 그러하듯. 처음 보는 바다, 처음 보는 호랑이, 처음 보는 가을 하늘, 처음 보는 하얀 눈, 처음 보는 지중해, 처음 부닥친 어려움, 처음 들어가는 내 집, 처음 마시는 맥주 맛이 그러하듯.


37년 전 아들과의 첫 만남도 그랬다. 20대 후반 결혼하고 1년 반이 지나 아들이 태어났는데 내 팔뚝만 하게 생긴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그 황홀함과 기이함. 오밀조밀하게 생긴 얼굴과 몸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던지. 2주 후 아들을 포대기에 싸안고 집 밖으로 처음 외출했을 때는 어찌나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충만하고 희열이 넘치던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다리에 힘이 솟구쳤다. 꼭 우주를 품에 안고 가는 것 같았으니까.      


모델 일도 나에겐 처음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몽땅 처음 마주하고 경험하는 일들이다. 그래서인지 촬영을 하고 나면 놀랍게도 에너지가 충전돼 있는 나를 발견한다. 촬영을 마치고 혼자 돌아오던 어느 때인가는 내가 마치 새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비록 이 놀라운 경험을 그냥 흘려보내버렸지만. 왜 이렇게 새 힘이 나는 건지 묻지 않고 그냥 좋아만 했을 뿐. 그런데 이번에 안경 광고 촬영을 앞두고 설렘을 자각하게 되면서 새로이 발견했다. 그동안 모델 일을 하면서 에너지가 충전되는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 가져다준 신선함과 강렬함 때문이라는 것. 처음이 가져다준 설렘, 기대, 상상, 호기심, 생기발랄함, 놀라움, 깊음 때문이라는 것.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분의 글을 참 좋아해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특별히 액자에 넣어 자주 바라보는 글귀가 있다.

[처음처럼]

언젠가부터 소주의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가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우리 모두 처음처럼 숨 쉴 수 있다면, 처음처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처음처럼 일할 수 있다면, 처음처럼 서로를 마주할 수 있다면, 언제나 새봄처럼 처음처럼 새날을 맞이할 수 있다면, 정녕 설렘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설렘이 있는 한 삶이 고되어도 살만하리라.      


그러고 보면 모델 일을 시작한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비록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요 수많은 번민을 해야 했던 일이지만(솔직히 지난 3년처럼 내적 고민과 방황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설렘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이 일을 통해 상상하지 못한 선물, 즉 [처음]을 선물 받고 있으니까. [처음]이 가져다주는 설렘, 기대, 상상, 호기심, 생기발랄함, 신선함, 놀라움, 깊음, 강렬함을 선물 받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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