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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끝에서 홀로서기

계속되는 갈지자 행보

  다시 마음을 비우고 이전의 일상을 살던 2021년 2월 하순. 생각지 않은 일이 또 일어났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광고 촬영 제안이 들어온 것. 그것도 동시에 두 개나. 하나는 패션 화보 촬영이었고, 하나는 Reebok 운동화 촬영이었다. 잔잔하던 마음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리복의 경우 출연료를 얼마나 받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한국과 아시아 몇 나라에 광고할 예정이라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감이 오지 않아서 K 대표에게 전화해 자문받았다. 다행히 일이 잘 진행돼 화보는 3월에 찍고, 리복은 4월에 찍었다.     

 

  내가 생각지 않은 두 제안을 받은 것은 그동안 대표와 작업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여 동안 꾸준히 작업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 축적돼 있었기에 받은 제안이었다. 그런 만큼 대표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4월 중순 리복 광고를 찍은 후 ㄱ 대표에게 전화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모두가 대표 덕분이라고. 그러자 빨리 나오라고 사정 아닌 사정을 했다. 그전에 통화할 때도 ‘선생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선생님, 빨리 나오셔서 함께 하셔야죠’라며 손을 내밀었다.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내미는 손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내미는 손을 뿌리칠 만한 빤빤함이 내겐 없었다. 아니, 솔직히 고마웠다.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여 딱 부러지게 대답은 안 했으나 마음으로는 내미는 손을 잡았다. 6개월을 잠잠히 지내다가 2개의 광고를 연달아 찍은 것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데 큰 힘이 됐다. 나는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5월 중순 복귀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함께 활동하던 <아저씨즈>가 떴다. 릴스 영상 하나가 대박이 터져 온갖 매체와 인터뷰란 인터뷰는 다 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복귀해 좀 염치없는 마음으로 몇 군데 인터뷰에도 참여하고, 이전처럼 사진과 영상 작업에도 꾸준히 함께했다. 여기저기서 촬영 제의도 들어와 아저씨즈 멤버들과 함께 광고를 찍었고, 6월부터는 개인적으로도 광고 촬영 제안이 꾸준히 들어왔다. 흑삼, 백화점, 면도기, 학습지, 자동차, 안경, 구두, 운동화, 금융 광고까지 다양하게 찍었다. 특히 패션 화보 촬영을 많이 했다.      

  모델하는 맛이 났다. 광고 촬영을 하다 보면 긴장도 많이 하지만 삶에 활력이 생겨서 참 좋다. 마치 새로운 공기를 흠뻑 마신 것 같달까, 낯선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달까, 아무튼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온몸에 생기가 도는 것 같은 충만감에 젖는다. 무슨 촬영이든 촬영할 때면 대부분 스태프나 포토그래퍼가 ‘멋져요’, ‘좋아요’를 연발해주니까. 촬영장은 어쩔 수 없이 모델을 중심으로 스태프가 움직이고, 모델에게 최선의 배려를 해주니까. 작업한 후에는 멋진 작품이 남고, 돈까지 받으니까. 

  사실 칭찬받고 기분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은가. 나도 촬영할 때면 어디서도 받지 못한 칭찬 세례를 많이 받아서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도 피곤함보다는 온몸의 세포가 다시 숨 쉬는 것 같은 생기가 느껴진다.      


  특히 현대자동차 광고를 찍을 때가 최고였던 것 같다. 여주 산골의 목공소 딸린 카페에서 촬영했는데, 촬영하는 중이나 촬영 준비를 할 때 다들 얼마나 열심히 ‘멋있어요’, ‘최고예요’를 연발하는지 얼굴이 따가우면서도 자신감과 행복한 기운이 콸콸 솟구쳤다. 사진작가님도 지금까지 촬영한 분들과는 격이 달랐다. 모델이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고 차분하게 이끌어 주었고, 섬세한 감각으로 구도와 포즈를 잡아주었다. 사진 작업을 다 마친 후에도 프로필에 쓰라며 기막힌 위치를 잡아 개인 사진까지 찍어주는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멋지다는 칭찬과 함께. 얼마나 감사하던지. 얼마나 행복하던지. 얼마나 충만하던지. 얼마나 격려가 되던지.      


  이렇게 몇 개월 동안 광고 촬영을 하다 보니 모델하는 맛도 나고, 내가 모델이라는 정체감과 책임 의식도 좀 생기고, 촬영 분위기를 읽는 눈도 좀 열린 것 같고,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정도도 조금은 깊어진 것 같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돌아볼 정도의 여유도 좀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나름의 모델상도 그려봤다. 단순히 비즈니스로 일하는 모델이 아니라 인격적인 소통을 하는 모델, 쉼 없이 공부하며 세상과 대화하는 모델, 겉멋뿐 아니라 겉과 속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델, 세상과 삶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모델이면 좋겠다는.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모든 면에서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했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을 느끼던 때에 K 대표가 큰 결정을 했다. 22년 1월, 유능한 PD를 충원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교육을 시작한 것. 사진 찍기, 사진 보정, 패션의 역사, 스타일링, 인스타그램 관리, 주인공 서사의 특징과 주인공으로 살기, MZ 세대의 문제의식과 행동양식, 동영상 편집기술, 자기 캐릭터 찾기 등 어디에서도 듣기 힘든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내용과 깊이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훌륭하고 탁월했다. 어지간한 강의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귀가 꽤 까다로운 편인데 PD의 강의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참으로 유익하고 감사했다.      

  이렇게 열심히 문을 두드리면서 힘겹게 길을 찾아 한 걸음씩 갔다. 사진 작업과 짧은 동영상 작업(릴스)을 줄기차게 하면서. 그런데 탁월한 강의를 듣고 열심히 이런저런 작업에 참여하면서도 내적인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항상 물음이 있었다. 모델의 길을 가는 것이 과연 내 존재와 삶에 어울리는 일인지가 의문이었다. 3년 이 넘게 이 의문과 씨름했는데도 여전히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이 의문과 씨름하며 밤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꿈이 번개처럼 번쩍했다.     

 

  인류 최초의 100세 시대를 맞은 첫 세대로서 시니어 문화라고 할 만한 게 없는 현실에 건강하고 성숙한 시니어 문화를 일으키자. <new grey 문화운동>을 하자. 

  K 대표가 이끄는 회사는 단순히 광고 찍고 멋진 시니어를 거느린 회사가 아니라 new grey 문화운동의 대표 브랜드가 되고, <아저씨즈>는 단순히 멋지게 옷 입고 잘 노는 시니어가 아니라 new grey 문화운동의 아이콘이 되자. 

  회사와 <아저씨즈>는 수직적 갑을관계가 아니라 이와 잇몸과 같은 관계, 즉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서로에게 감사하고 존중하는 수평적 협업 관계가 되자.      


  순간 가슴이 뛰었다. 모델로의 첫걸음을 내디딘 지 3년 2개월 만에 비로소 갈 길이 보였다. 비로소 씨름하고 씨름하던 의문이 사라졌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K 대표에게 대충 이야기하고, 날을 잡아 모두 앞에 발표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현재를 냉정하게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비상과 비전의 형식으로 정리해 발표하고 토의했다. 회사 측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반면 <아저씨즈> 동료들은 자기네 마음을 대변해주었다며 대환영했다.      


  꿈을 보자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무거운 법. 현실은 꿈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니, 현실은 대체로 꿈을 짓밟는다. 얼마 지나지 않자 회사 측에서 내 제안에 딴지를 걸어왔다. 회사와 <아저씨즈>가 수평적 협업 관계를 이루자는 내 제안이 아주 몰염치한 행위라는 것이다. 회사가 그동안 엄청난 수혜를 베풀었는데 이제 와 권리를 챙기겠다고 나선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대표가 직접 딴지를 걸어온 건 아니었지만 가장 악의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딴지를 거는 것에 경악했다. 그 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요구하는 게 많아지고 압박의 강도가 높아졌다. 언어가 점차 차가워지고 노골화하고 험악해졌다. 서로 존중하는 협업 관계가 아닌 쪽으로 판이 기울어갔다.  


  그즈음 또 나를 심드렁하게 한 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짧은 동영상(릴스)이었다. 회사는 재미있는 동영상을 많이 올리는 것이 팔로워를 늘리는 길이라 생각하고 릴스 찍는 일에 집중했으나, 나는 그 방식으로는 절대 new grey의 아이콘이 될 수 없다, <아저씨즈> 고유의 콘텐츠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젊은이를 흉내 내는 것으로는 반짝 주목을 받을지 몰라도 잠깐 소비되고 사라질 게 빤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나 혼자 안 찍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룹으로 함께 하는 한 원치 않아도 찍어야만 했다. 


  나는 심히 안타까웠다. 하여, 이 흐름을 바꾸어보려 했다. 서로 감사하고 존중하면서 마음으로 하나 될 때 창조의 시너지가 나올 것이라 믿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보려 나름 소통했다. 정말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쁨, 협업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 대표가 아닌 사람이 모종의 역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점차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의 양상과 깊이도 이전과 달라졌다. 3년여를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모델의 길을 가느냐 마느냐는 갈등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그런데 한순간도 불평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도 요구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도 내 존재와 삶을 성공의 제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존재와 삶이 무엇보다 존귀하고, 시간과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한순간이라도 불평하며 사는 것, 바깥 요구에 복무하며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회사와 함께하면 분명 여러 유익이 있다. 가능성의 문을 더 많이 열 수 있고, 광고 촬영 기회도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그동안 함께 쌓아 올린 자그마한 자산도 지킬 수 있다. 그런 만큼 번민과 갈등이 깊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마음 저 마음이 들랑날랑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심히 방황했다.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선택했다.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을 얻기 위해 내 존재와 삶을 요구받으며 살 수는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요구받으며 사는 것은 주인의 삶이 아니니까. 하여 22년 6월 말, K 대표와 함께한 지 2년 5개월 만에 홀로서기를 결행했다. K 대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남아 있을 때, 다시 만날 때 서로 웃으며 손 맞잡을 수 있을 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때다 싶어’ 홀로서기를 결행했다. 주인의 삶, 주체의 삶을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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