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겠다는 말 뒤에서

10화

by 전석표

“진학이 됐든, 취업이 됐든, 아니면 잠깐 쉬었다가 가는 거든… 네가 무얼 선택하든 상관없어. 단, 하나만 빼고."


담임은 서류철을 덮으며 말했다.


“네가 널 포기하는 선택만 아니면 된다.”


나는 침을 삼켰다. 딱히 감정이 북받친 것도 아닌데, 말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담임이 덧붙였다.


“결론 지금 안 내도 돼. 근데, 2학기 동안은 진지하게 생각해라. 알겠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상담은 거의 끝난 듯했지만, 담임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민재야.”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애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잔상처럼 남았다.


그날 밤, 무심코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바닷가, 술잔, 단체 사진들. 예전에 내가 서 있던 자리엔 다른 얼굴이 있었다. 나는 몇 장을 넘기다 화면을 엎었다.


“…답답하네.”


딱히 가고 싶은 데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또 그곳이 생각났다.


하루 뒤, 축사에서의 내 동작은 한 박자씩 밀렸다. 사료를 채우다 멈췄고, 물을 갈다가 숨을 골랐다. 그때 여자아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 선배.”

“어.”


마주 본 여자아이가 살짝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제가 내일 축사에 오지 못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


물으니, 여자아이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아서는 내게 말했다.


“실은, 전국모의평가가 있어서요. 빠질 수가 없어서… 저도 최대한 빨리 끝나는 대로 오려고 했는데, 늦게까지 진행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지.”


빗자루를 한 손에 들고 걸터앉은 내게, 여자아이는 이윽고 또 신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대신 내일, 애들 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어, 알겠어. 걱정 마.”

“정말 감사해요. 선배.”


그 말까지 전하고 나서야 아이의 눈매는 안도한 듯 풀렸다.


다음 날, 나는 혼자 축사를 맡았다. 아침 일찍 들러본 건 처음이었다. 늘 똑같은 일이어도 부탁을 받았다는 것 하나로 마음가짐이 달랐다.


아침은 조회로 인해 촉박해서, 마저 못한 일은 점심에 급하게 다녀갔다가, 또 방과 후에 곧장 달려왔다.


“내일 오면 좋아하겠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얘기했다. 사람한테 들려주듯 이야기해도, 토끼들은 그저 씹는 소리만 냈다.


일을 마치고도 축사를 떠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엔 ‘동생’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어, 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곧, 대수롭지 않아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형, 형…!”


너머로 울음이 먼저 들리자, 가슴이 절로 철렁 내려앉았다.


“울지 말고 말해. 무슨 일인데."

“할아버지… 다치셨어. 지금 병원이야. 형도 빨리 와봐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나는 축사 문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울지 마, 잠깐만 지켜, 내가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뛰었다. 온 신경이 병원으로 쏠려 버렸다. 그래서였다. 스쳐 보낸 시야 속, 축사의 문은 끝내 닫히지 못했고, 아슬아슬하게 열린 채로 남아 흔들렸다.


닫아야 한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붙잡을 새가 없이, 나는 달리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은 길었고, 동시에 짧았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동생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 옆을 지키느라 아무 생각 없이 자정을 넘겼다.


“빨리… 좀만 더 빨리 뛰어.”


날이 밝자마자 바로 뛰었다. 교실이 아니라 축사로 향해야 한다는 불안이, 심장보다 먼저 앞서 있었다.


아니겠지. 아무 일 없겠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 계속 선명해졌다.


축사가 가까워졌다. 아침 햇살이 지붕 위에 얹혀 있었고, 소름 돋을 만치 조용했다. 그때, 열린 문 너머로 흘러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설마.”


풀 냄새였다. 피가 밴 풀 냄새.


걸음이 굳었다가, 어떻게든 움직였다. 문턱을 넘었을 땐, 바닥의 건초가 검붉게 젖어 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안. 미처 열리지 못한 우리 한쪽에 몸을 웅크린 토끼가 있었다.


목덜미가 깊게 패인 채, 숨이 없었다. 옆에도, 또 그 옆에도.


“…아.”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실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현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제, 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이 전신을 내리쳤다.


변명할 틈도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