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말하던 날에

11화

by 전석표

“…선배?”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자아이의 시선이 축사 안으로 옮겨지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 나도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안을 둘러보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붙잡지도, 설명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작아져 앉아 있었다.


아침 이후, 하루 종일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종이 울려도, 웃음소리가 들려도 모두 멀었다.


방과 후, 축사 앞에 섰을 때 안에서는 원래 들려야 할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서도 유독, 오늘따라 무겁게 닿는 목소리.


“괜찮아… 이제 괜찮아.”


문을 여니 여자아이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어버린 우리 앞에서 남은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많은 걸 눌러 삼키는 얼굴.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선배 오셨어요.”


여전히 시선을 토끼들에게로 머물며 여자아이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침묵할 수 없는 공간에서, 여자아이가 먼저 운을 뗐다.


“아침에… 말 못 했어요. 그땐….”


말끝이 흐려지며, 여자아이는 우리 안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이거, 얘네한테 제일 위험했던 게 뭔지 아세요?”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여자아이가 대신 말을 이었다.


“문이에요.”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고,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여자아이의 운동화 위에 앉은 토끼가 얼굴을 파묻으려 했다. 아이는 그 토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제 문… 안 닫고 가셨죠.”


확인도 아니고, 비난도 아니며, 결론 같았다.


“맞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미안해.”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한 박자 쉬고 나서, 담담하게 입을 뗐다.


“하루만 부탁드린 거였어요. 선배한테 맡기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틀렸다’는 문장을 대신했다.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둘이서 하는 일이라고 하셨죠.”


그건 내가 한 말이었고,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대답할 수 없었던 건, 내가 그 말을 거짓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적이 그런 내 무능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만 한 책임을, 정말 가지신 걸까요?”


그 말은 크게 울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였는데, 맞은편에서 듣는 사람에겐 가장 크게 들리는 종류의 말이었다.


그 한 문장을 건네받으면서, 내 머릿속에선 축사에서의 날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매일 별거 아닌 듯 농담하고, 일은 힘들어도 이상하게 편안했고, 토끼들 앞에서는 어쩌다 웃고 있던 나.


그 시간이 쌓여서, 마치 내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던 나.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이게 말이 되나.


억울했다. 아니, 한심했다. 뭉개진 가슴 한쪽이 세게 눌렸다. 그러면서 정말 내 탓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아무도 이름 붙여주지 못할 감정 하나가 깊이 치밀어올랐다.


부끄러움인지, 분노 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의 뒤섞임 같았다.


“그래.” 입이 떼졌다.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조차 몰랐다.


“…관두자.”


말과 동시에 공기가 멎었다. 나는 균형을 되찾지 못했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나 같은 꼴통이… 너 같은 영재반 애를 어떻게 돕냐."


그 말까지 나가고 나서야, 내가 비로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생히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돌릴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우리 밖으로 나와 있던 토끼를 조용히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몸을 일으켰을 때, 아이의 얼굴은 전과 달랐다.


눈물 한 방울. 흐르는 것도 아닌데, 울음도 아닌데. 그냥, 견디다가 흘러넘친 것 같은 한 방울. 그 표정에 나는 말을 잇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입을 열면 무너질 것 같은 쪽이 나인지, 그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우리의 대화 아닌 대화는 그렇게 끝이었다.




하루, 가지 않았다. 이틀, 또 가지 않았다. 일주일. 그러면서 한 달. 그렇게 내 학교생활은 축사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져 버렸다.


수업, 밥, 집, 겉으론 똑같았다. 그러나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가장 쉬운 곳으로 갔다.


“마지막 스트라이크만 됐으면 끝냈는데, 진짜 열받네.”

“아, 또 한 핀 남기고 말았어? 똑같다, 똑같아.”

“볼 무거운 거 들었어야 했다니까… 돈만 터졌다.”


거기 있었다. 예전부터 서 있던 그 자리에서.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