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남는 것들

9화

by 전석표

여름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주 무렵엔 영재반 자습도 마무리지었고, 남은 며칠 간은 집에서 쉬며 새 학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개학을 앞둔 금요일, 나는 그동안과는 다른 일로 학교를 들렀다. 영재반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학습 자료를 받아 가라는 공지 때문이었다. 배부 장소는 급식실, 시간은 오후 한 시부터였다.


“고생했어, 연서, 2학기에도 잘해보자.”

“네, 선생님.”


꾸러미는 제법 무거웠다. 두 팔로 감싸안으니 책 모서리가 팔목에 살짝 눌릴 정도였다.


급식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팔을 한 번 흔들었다. 책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책에 담긴 ‘해야 할 일들’ 때문인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서였다.


1층 현관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분주해야 할 걸음을 내 의지로 멈춰 세웠다.

“후.” 숨을 잠시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바로 집에 가면, 집중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방향을 틀었다. 축사 문 앞에서 손에 힘을 주어 밀었다.


“어…!”


문이 열리자마자 몸이 휘청했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얼떨떨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드럽네.”

늘 힘을 줘야 열리던 축사 문이 오늘은 속절없이 가볍게 열렸다.


“…경비아저씨께서 고쳐주신 건가?”


그 이질감을 더듬듯 문을 앞뒤로 느리게 움직여보다가 뒤늦게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고서야 알았다. 문을 고친 사람은 경비아저씨가 아니라는 걸.


나는 그저 말없이 문턱에 서 있었다. 대신 속으로만 목소리가 되지 못한 말을 새겼다.


“…선배셨구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공구 상자, 그리고 원목 의자 위에 누운 채로 눈을 붙이고 있는 사람. 선배였다.


망설여졌다. 선배를 깨울까, 그런데 막상 깨우고 나서 선배가 놀라거나 어색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상태로 몇 분을 보내다 결국은 걸음을 떼기로 했다.


나는 최대한 인기척 없이, 사방에 있는 공구를 천천히 정리했다. 우리 안 토끼들도 소리 없이 나를 바라봤다. 마치 그렇게라도 도와주려는 것처럼.


얼마 뒤, 작업 장갑을 마지막으로 공구함에 넣으며 뚜껑을 닫고 나서 나는 선배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바람을 맞다가 그대로 스르르 잠든 얼굴이었다.


나는 축사에 가방을 두고 몸만 빠져나와 걸었다. 들를 곳이 있었고, 곧 늦지 않게 돌아왔다.

가방을 챙긴 다음 문 앞에 섰다.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선배의 모습은 또렷했다.


“잘 쉬어요, 선배.”


말 대신 문을 닫았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얼마나 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 축사는 여전히 잔잔했다. 다만, 바람의 방향이 달라져 있었다.


천장의 팬이 돌아가고 있었고, 정리된 공구, 말라 있는 장갑, 그리고 의자 옆에는 포카리스웨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왔었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다, 나는 한 번 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여름 방학이 완전히 끝나며 2학기가 시작되었다.

교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정돈돼 있었지만, 나만은 아직 어수선했다.


“다들 잘 쉬었냐.”


조회 시간, 담임의 얼굴을 보며 개학을 실감했다. 담임은 아이들을 가만히 훑다가 입을 뗐다.


“어째 다들 폭삭 늙어서 온 것 같냐, 왜. 으.”


그러면서 진절머리 치다가도 이내 모두에게 말했다.


“방학 끝났으니까, 이제 다시 정신 붙잡아라. 수능 얼마 안 남았다. 곧 진학 상담 들어갈 거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오지 말고 각자 정리해 둬라. 이번 주는 적응 기간이다. 몸도 머리도 좀 맞춰놓고.”


개학 첫 주는 말 그대로 리로딩 기간이었지만, 본격적인 건 그다음 주부터였다. 담임의 진학 상담이 시작되었다.


교무실 문이 닫힐 때마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돌아왔다. 그 문이 열릴 때마다 이번엔 내 차례가 가까워졌다. 결국, 내 이름도 그렇게 불렸다.


“강민재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열자, 교무실 특유의 냄새가 먼저 스쳤다.


“앉아.”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성적표를 책상 위에 펼쳐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너도 알겠지만, 네 성적이 좋진 않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할 것도 없었다.


“근데 말이야.”


담임이 성적표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넌 성적이 아니라, 방향 때문에 막히는 애야.”


이번에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는 건 괜찮아. 하지만, 모른다고 가만히 있어선 안 되는 거야.”


담임은 한숨 대신, 목소리를 낮췄다.


“넌 뭔가 마음을 먹고 움직일 때는 끝까지 하는 애다. 내가 그걸 모르겠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담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걱정되는 거야. 방향을 잘못 잡아버리면… 너 같은 애가 제일 크게 다치니까.”


그 말에, 머릿속이 잠시 텅 빈 기분이 들었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