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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양 Apr 27. 2024

변호사는 아닌데 로펌에 굴러다닌다

페라리걸? 아니 패러리걸




직장인이에요, 하면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다. 이 순간 살짝 말문이 막힌다. '로펌'에 다녀요, 라고 했을 때 내가 마주한 반응은 매번 모 아니면 도 였다.


로펌이 뭔지 모르거나, 변호사냐며 감탄한다. 이 때 구구절절 해지는 것이 싫다. 구구절절하게 아니요저는변호사는아니고요그냥로펌에근무하는직원인거죠. 두 번째 질문이 돌아온다. 변호사는 아니라고 하고... 그럼 로펌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그래도 1년차 까지는 구구절절 제가로펌에서무슨일을하냐면요... 열심히 설명하곤 했는데, 6년차를 찍은 지금은 그냥 허허실실 웃으며 넘긴다. 우리 엄마는 최근에야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변호사는 아닌데 로펌에 사는 생물체.

패러리걸 입니다.



나도 처음 '패러리걸' 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패러리...girl? 그 때 내 나이가 스물 일곱이었는데 대뜸 패러리...girl 이라고 하는 변호사님을 3초 정도 수상하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화이트보드 위에 적힌 글자는 girl이 아니라 [para-legal] 이었다.


그렇군.

나는 오늘부터 패러리걸 이다!


집에가서 이야기 했더니 아빠가 레이싱걸 같은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 딸을 보소. 다시 태어나도 레이싱걸이 될 재목은 아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 말하자 페라리걸? 페라리? 페라리도 없는데 뭔 놈의 페라리걸 이냐고. 역시나 다시 태어나도 페라리는 못 살 것 같다.







면접을 보러 다닐 때만 해도 20대 중반이었으니, 왜 로스쿨에 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다. 잠깐 일 하다가 로스쿨 가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오래 일 할 사람이 필요한데.... 법학과 출신이고 어렸으니 그런 의심을 할 만도 한데 내 입장에서는 좀 억울했다. 그렇다고 면접을 보는 변호사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내가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로스쿨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정말 공허해 보였기 때문이니까.


물론 로스쿨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첫 직장에서 내가 본 변호사들은 '사'자 직업이란 그저 허울 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긴 했다만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다. 나는 정말 '변호사'라는 업을 하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나는 절대 못 할 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패러리걸' 이라는 직업이 내 적성에 잘 맞을리 없다.


하지만 서른의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모든 직장이 공휴일에 꼬박 꼬박 다 쉬고 연차까지 쓸 수 있지는 않다는 걸. 로펌 바이 로펌이지만 법원의 여름휴정기와 겨울휴정기에는 사실상 일이 없다고 무방하다. 이 시기에 여름휴가와 겨울휴가를 맞이하는 로펌도 있다.


지금은 변호사가 넘치는 시대고... 로펌도 그만큼 많다. 일만 잘 배워두면 어디로든 이직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어차피 문과에서 최고 아웃풋을 변호사로 치는데, 변호사가 될 생각도 될 수도 없이 서른이 된 나로서는 이제 가늘고 길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필요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도 경제활동으로는 나름 훌륭하다는 판단.

그래도 숨쉬듯 송무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다.


서른 즈음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직시할 수 있게 되지 않나. 모르는 척 할 뿐이지.

나는 두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해도 이 지구에 온전히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모두가 나름 땅을 딛고 사는데, 나만 자기부상고양이처럼 붕 떠있다.


이토록 심란할 때 나는 언니들을 찾는다.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왜 그런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란다. 이제는 정말로 덮어두고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날이 온 것이다. 20대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어린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20대 중반의 나는 대학원을 자퇴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크면 마음에 병이 든다는 것을 깨닫고 한 선택이었다. 무력한 나를 지키고 싶었고 달래고 싶었다. 하나를 그만 뒀다고 굶어 죽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내 안에 벽을 단단히 세웠다.


현실과 이상이 아니라,

경제활동과 자아실현으로 나를 분리 시켰다.

그리고 가운데 세워진 벽을 매 순간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 때문인지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과 별개로,

여전히 나는 내가 뭔가 이루지 못 했다고 생각하는 서른이 됐다.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아직 완전한 형체도 만들지 못한 슬라임 덩어리 같은 기분.


문제는 내가 뭘 이루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쓰기로 결심했다.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쓰는 것 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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