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에 걸쳐,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를 마쳤다.
장황한 이야기가 끝난 뒤, 상담사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이렇게 잘 컸어요?”
나는 머쓱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어딜 가서 ‘잘 컸네’ 소리를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저도 자부심 있어요. 제가 봐도 바르게 큰 것 같아요. 하하”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상담사님이 “이거, 정말로 대단한 거예요. 이런 일을 겪고도 이렇게 직장 생활하면서, 남에게 피해 안 끼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큰 것. 보통 일이 아니라 진짜로, 대단한 거예요.”
라고 진지하게 말해주셨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요?”
“네? 어떤 거요?”
“본인이 지금, 너무도 아픈 얘기를 하면서 하나도 아픈 사람처럼 얘기하지를 않았어요. 펑펑 울지도 않았고, 눈물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중간에 피식피식 웃으면서 얘기한 거 스스로도 알아요?”
“음.. 네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너무 깊이 이입하면 힘들어질 걸 피하고 싶어서, 반어적인 반응을 보이며 거리를 뒀다.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지금, 본인 얘기하는데 솔직히 말투만 놓고 보면, 슬픈 영화에 나오는 줄거리 요약하는 것 같았어요. 그냥 줄줄이 설명하는..”
“아.. 그 정도였나요? 음.. 감정이 있긴 있었는데.”
“지금, 말하면서 몇 프로 정도 풀린 것 같아요?”
“어.. 그래도 한 50은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정말로 힘들었던 사람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남의 일처럼 말을 했는데, 그만큼이나 많이 풀렸을까요? 사실 10프로만 쳐줘도 많이 쳐준 거예요.”
“그런가요.. 하하”
상담사님은 10프로만 풀렸을 거라 말하셨지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생각보다 큰 후련함을 느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꽉 막힌 채로 살아왔던 걸까.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에는 막연한 우울감과 정서적 불편감을 덜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단지 사회생활을 하며 지친 탓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상담을 하며 직장에서 화난 일들에 대해 쏟아내보기도 하고, 생각만큼 나에게 공감해주지 않는 상담사님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 탓'을 하면 시원하게 풀릴 것 같은데, 실은 내가 가진 비합리적으로 높은 기준과 신념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가진 주관들을 돌아보고, 그중 현실과 타협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봐야만 했다. 너무 많은 정서적 짐들을 지고 사느라 힘들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므로.
세상에는 분명 나를 힘들게 하는 일과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내 인생의 100%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내 무수한 스트레스에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보다는 추후 일들을 복기하고, 후회하며, 나와 그들의 행동을 탓하고 이유를 붙여보려는 발버둥에서 비롯된 '재생산된 스트레스'의 비중이 컸다.
그리고, 거기에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 '직장에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할 때 실수하면 안 된다',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라는, 지키지 못할 이상적 기준들이 일일이 따라붙었다.
항상 바짝 긴장하며 힘주고 노력하며 사느라, 내 감정은 종종 '틀린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만성적으로 지쳐있는 사람이 되었다.
감정은 약점이 아님에도, 드러내지 않고 참느라 급급했다.
그것을 해결해 보고자, 원인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찾아냈다.
나는 왜, 세상이 두려웠을까.
잘 해내야만 한다며 잔뜩 힘을 주고,
주변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열심히 만들어낸 기준들을 적용하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 세상을 넣어보려 발버둥 쳤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안전하다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 원인은, 자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었던 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서부터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
그렇게, 처음 계획엔 없었지만 상담사님에게 내가 어떤 가정에서 자라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털어놓게 되었다.
원래는 내 치부를 드러내는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말하지 않으려고 말을 빙빙 돌리며 피해 다녔었는데, 결국 털어놓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었다.
제대로 갖추어진 안전한 환경에서, 나의 가장 아픈 상처를 꺼내어 들여다보며,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적당히 직면해 보았다.
'괜찮은 척' 무장하며 몇 겹으로 가려두었던 장막을 거두어 아픈 곳을 꺼내는 경험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또 한 번 견뎌냈고, 성장했다.
아프다 울부짖던 '어린 시절의 나'를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고, 직면했으며, 그것이 현재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행복해지는 길'은, 세상을 향한 이상적인 나의 기대치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와 너를 인정하고, 현실과 타협 가능한 성장을 느리지만 확실한 템포로 이뤄내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무력하고 불안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다.
내 인생을 선택하며, 스스로 행복을 일구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제는 과거에 묶인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하고 극복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될만한 능력이 있다.
무리하며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힘들고 부족한 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부족하고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을 떼어낸다고 해서, 내가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원형'으로서 존재하던 나의 일부를 떼어내고, 나머지로 '이상적인 나'의 구색을 맞추려 노력하다 보면, 빈자리로 인해 계속해서 어딘가 긴장되고 당겨져 팽팽한 상태로 지내게 된다.
마치 피자 조각처럼 일부가 잘려나간 원형 천을, 억지로 맞붙여 모양을 맞추려는 것처럼.
잔뜩 마음의 주름이 진 채로, 팽팽하게 살다가 어느 날 못 견디고 찢어지면 우울증과 번아웃이라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그러니, 세상에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은 나를 수용하며 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감정표현이든, 건강이든,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은 되도록 소외시키지 말고 골고루 챙기며 살아가자.
그러지 않으면, 미뤄두었던 빈 조각은 어떻게든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이 이후로 상담은 짧게 1-2회 더 하고 마쳤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들이 무엇인지 파악했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파악했다.
그와 관련된 대화를 하며, 그 기억을 수용받는 경험을 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만성적인 기분 부전이 한순간에 나아지기는 어렵겠지만, 이미 몇 년간 치료와 운동을 병행하며 꾸준히 노력한 경험이 있으므로, 노력하며 살다가 힘들어질 때 다시 한번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상담 과정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나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힘들고 불편했지만 매우 중요한 경험치가 되었다.
앞으로도 살다 보면 일과 인간관계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치열하게 고민할 일이 생기겠지만, 이전만큼 두렵고 막막하지는 않다.
좀 더 가볍고, 행복하게 살 자신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