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부고(3)
아래는 당시에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썼던 글이다.
평소에 오은영 박사님이 나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상담해 주는 '금쪽상담소'를 즐겨 본다.
그 프로에는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른들도 종종 출연한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결혼이나 육아에 대한 생각을 가끔씩 해보는 편인데, 내가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뭔가 원칙적인 것에 대한 내용이다.
상처받은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서로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아이에게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을 나열해보곤 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남들에게 강요나 어필할 생각은 없다.
단지 과거 회상을 통해 내가 상처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참, 다양한 어른 금쪽이와 아이 금쪽이들을 보고 있다 보면, 이상적인 결혼과 육아라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동과 반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고, 아무리 진심으로 다가선다 하더라도 타고난 성향에 따라 아이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 순간 누군가 옆에서 내 행동을 잘했다 못했다 피드백을 해 주지도 않는다.
보고 있으면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치열하게 사는구나 싶다.
하긴, 한 인격체를 탄생부터 독립할 때까지 무탈하게 양육한다는 것은 웬만한 성직자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나를 낳으셨을 때의 엄마 나이를 계산해 봤다.
이십 대 중반이더라. 대학을 갓 졸업해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
그보다 몇 살을 더 먹은 나는 여전히 애처럼 살고 있는데, 엄마가 내 나이 땐 내가 벌써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겠구나.
새삼 대단하다. 고생 참 많이 하셨겠다 싶다.
내가 지금 기억을 다 가진 채로 나 같은 아이를 키우라고 한다면 솔직히 나도 잘 키울 자신은 없다.
그 애도 많은 불평불만을 갖고 있었겠지? 나는 나대로 많은 실수를 했겠고.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부모자식 간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상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도 방황의 시기를 거쳐 많이 아문 상태에서 돌아보니까, 서로 참 어려운 시기를 견뎠구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의 문제 상황들을 무작정 옹호한다거나 상처를 당연시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서로가 더 신중할 수 있었고,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니까.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민망해서라도 그렇게 무작정 낙관적인 말을 내밸고 싶지는 않다.
자식 된 입장에서, 내 세계의 전부이자 거역할 수 없는 대상인 분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평생 잊을 수없는 충격이자 애착에도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한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읽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힘든 시기를 겪었거나/겪고 있고, 그것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이 내 인생 전부를 장악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손에 자랐지만, 커서는 스스로의 손에 자라난다. 본인이 본인 그 자체이자 스스로의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울고 싶을 때 멈춰 서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다면 꼭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몸만 컸다고 다라 생각하지 말고, 내 마음의 아이가 발걸음 맞추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한 번씩 꼭 뒤돌아 봐 주어야 한다.
신체가 평생에 걸쳐 자라고 나이 들어 변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평생 자라야 한다.
몸과 마음을 잘 먹이고 돌보며 키워야 한다.
손이 많이 가서 귀찮더라도, 나의 최우선 양육자는 나이기에, 나만은 늘 내 편이어야 한다.
물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비판의 목소리도 외면하지 않아야겠지만, '내'가 수많은 내 목소리들 사이에서 중재를 잘해야 한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나는 온전히 내 편이되, 상처 입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완전히 혼자인 삶을 택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내게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자격은 없기 때문에,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혼자 명상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는 내 모습을 통해 거울을 보듯이 깨닫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나도 몰랐던 내 습관과 장단점들을,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깨닫는 경우도 많다.
다른 환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세계를 알아갈 수도 있다.
내면의 저울에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반대편에 내가 아닌 상대방이 얹어줄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힘들 때 스스로 한 공부와 여러 생각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위로가 없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현실을 바꿀 에너지조차 없어 주저앉아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따뜻한 말과 격려를, 그리고 조건 없는 기다림을 먼저 베풀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나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는 법을 쉽사리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상대의 가벼운 호의였든, 무언가를 희생하며 베푼 무거운 책임감이었든.
그로 인해 회복된 긍정적 에너지로 내가 일어선 뒤에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긍정적인 순환이 된다.
이렇게 글은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 전달하듯이 썼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나에게 해주고 싶던 위로였다.
머릿속으로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는 것보단, 글을 통해 꺼내놓고 나서 다시 읽어보는 것이 훨씬 더 위안이 되곤 한다.
그래서, 그 때의 나보다 훨씬 더 성장한 미래의 내가 건네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감정을 이입하고 한 글자씩 써내려갔었다.
20대 중후반이던 내가 그 짧은 휴가 기간동안 회복하기엔, 너무도 깊고 어두운 감정이었으므로.
나는 휴가가 끝나면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겠지만, 분명 애도의 감정을 소화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었다.
빠르게 괜찮아지려 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성장했을 미래의 나를 믿고 벅찬 아픔들은 조금씩 흘려보내자고 다짐했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죽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경중은, 상황이 어떻든 결코 가볍다 할 수가 없다.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지냈더라도, 어떻게든 얽혔던 인연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는 게 너무도 덧없다.
한 때 같은 가정을 꾸렸지만, 헤어지고 나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쓸쓸이 죽음을 맞이한 그 분을 떠올리며 덧없음을 체감했다.
하지만 오히려, 덧없기에 더 힘주어 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 해 내 색을 발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찰나의 시간을 살다 가는 우리지만, 적어도 나를 거쳐가는 누군가는 좋은 영향을 받길.
그 작은 노력과 기억들이 쌓여, 먼 훗날 나의 덧없을 죽음을 앞두고도
나만의 색으로 찬란한 삶을 살았음을 인정할 수 있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다.
다음 글부터는, 서서히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나를 돌보는데 필요한 내용들을 찾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