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여 첫 학기 철학개론 시간에 인식론, 존재론 등 철학의 제반 문제들에 대해 배웠다. 세부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직까지 꽤나 선명하게 머리에 남아있는 내용 중 하나가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에 관한 것이다. 즉 인간이 사는 것이 미리 정해진 운명에 의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유의지대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운명론을 믿는 자는 정해진 운명대로 자신이 사는 것이고 자유의지론을 믿는 자는 자신이 운명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철학적 사고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고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거라 어떤 게 맞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단지 어떤 걸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 어려움을 겪을 때 그것을 전적으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라면 소심한 성격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자신이 과거 저지른 잘못한 일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고 받아들일지 모른다. 반면 강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자신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이 진정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살고자 할 것이다.
예순까지 살아온 내가 보기에 삶은 모든 게 운명 지어지는 건 아닐지언정 운명이란 큰 물줄기가 있고 이를 벗어나긴 어려운 거라는 생각은 든다. 우선 동양의 주역은 태어난 시간에 따라 사주, 팔자, 즉 운명이 정해진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 과거에 그런 걸 미신이라 무시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백지에서 시작, 노력으로 개척하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을 했건만 태생적으로 재능이 일천한 분야는 남다른 노력으로도 신통한 결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능이란 유전적인 것이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특정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잠재된 원초적인 관심도 있고 그 일에 대한 집중력도 강하여 그 일을 할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바탕 위에 있는 것이고 발전 속도도 더 빠르다는 것이다.
연예인의 자녀 중 천부적인 끼와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성공한 경우가 있다. 이덕화는 유명한 성격파 배우 이예춘의 아들이다. 지금 톱스타인 그도 탤런트가 되어 처음엔 몇 년간 단역만 했다고 한다. 그 후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주연을 꿰찼는데 이덕화가 보여준 연기를 보면 그 속에 연기하는 이의 혼이 느껴진다. 프로야구에서 입단과 동시에 주전이 되며 국내 최고의 타자가 된 이정후도 부친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다. 특히 국제경기에서 타격하는 걸 보니 국내의 선수 중 최고의 컨택 능력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운명이 뭔지 하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자신이 남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가 과연 어떤 것이란 걸 안다면 거기에 올인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남들이 앞으로 전망이 좋다고 하는 분야를 곁눈질할 경우 자기의 재능과 무관하다면 관심을 갖는 자체가 미련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감춰진 원리를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은 알게 되니 삶이란 조금 괴롭다고 포기하기보다 일단 오래 살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