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짐승 그리고 하루살이는 수명이 각기 다르다. 짐승들 중에서 수명이 인간보다 긴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는 수년에서 수십 년으로 그리 길지 못하다. 그렇다면 삶의 길이와 삶의 내용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가늘고 길게' 또는 '굵고 짧게' 또는 '굵고 길게' 등 재미있는 표현들이 있다. 가늘다든지 굵다든지 하는 건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평가로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혹은 권력 등과 크게 관련되는 것 같다.
인간이 태어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동하며 보내는 시간은 그다지 짧지만은 않다. 요절하는 사람도 있지만 요즈음은 여든까지 강산도 몇 번씩 바뀌는 동안 가정과 직장을 오가며 작고 큰 기쁨과 괴로움을 두루 경험한 후 결국 세상과 작별한다. 그럼에도 종착점에 도달해서 뒤를 돌아보면 삶은 허무하기만 하다는 게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인간이 암만 돈이 많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들 이를 영원히 누릴 수는 없기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유행가가 오랜 세월 동안 이토록 애창되는지 모른다.
인간의 운명이 이렇다 보니 술을 한잔 걸치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고 흥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끝이 빤히 보이는 삶 속에서 큰 욕심을 가져본들 삶은 허무하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의 건너편에 있는 게 종교이다. 성서란 현미경을 통해 바라보면 삶이란 세포조직에는 온갖 '불확실함'과 '불안' 그리고 '허무'란 병균이 득실거린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약으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있으며 그 약을 먹음으로써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치료법에 대해 십자가가 붙어있는 크고 작은 종교클리닉에서는 주일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실시한다.
불나방과도 같이 하루 반짝 살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와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먹을 걸 찾아 어슬렁거리다 결국 기력이 떨어져 숨을 거두는 짐승과 비교해서 인간의 삶은 결코 짧다거나 하찮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지구란 공간을 뛰어넘어 우주까지 향하는 인간이란 존재가 단지 끼니나 해결하기 위해 일이나 하며 흔적도 없는 삶을 산다면 인간다운 삶을 살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과 확연히 차별되는 인간의 삶이란 과연 어떠한 걸까? 우선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속성은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정신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배가 고프거나 춥고 또한 궁할 땐 양식과 옷 그리고 돈만 있으면 마냥 행복할 것만 같지만 굶주림과 추위 또한 궁핍함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결코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원의 울타리와 같은 본능의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는 짐승과 달리 인간은 두뇌와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험난한 인생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발전을 해왔다. 이러한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 가운데에는 돈과 권력에의 집착이 있다. 도약과 비상을 꿈꾸는 인간이지만 욕심과 독단은 인간을 퇴보하게 하거나 심지어 몰락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하루살이라는 말은 삶의 길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삶의 내용을 놓고 본다면 인간의 탈을 쓴 하루살이도 있다. '하루살이' 인간이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찮은 생각에 취해 고인 물과도 같이 사는 경우 혹은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도 반성하기는커녕 정당화시키기 바쁜 경우 또한 하이에나처럼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사는 경우 등 다양한 하루살이가 존재하리라 보인다.
인생은 나그넷길이고 정답은 없는 허무한 것인지 모르지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나 흥얼거리며 시간을 헛되이 보낼 만큼 하찮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하루살이와 확연히 다른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주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늘 새로움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