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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Nov 01. 2023

사와 철학 10

호모 라보란스: 노동하는 인간

Y의 이불

                   —문성해

반지하방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면

삐걱이는 침대 위에

그것은 펼쳐져 있습니다

한번도 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그것에겐

시큼한 물비린내가 납니다


호수와 뭍의 경계에서

신발을 벗는 자와도 같이

당신은 그 속으로

옷을 입은 채 뛰어듭니다

어린 날 냇가에서처럼


당신은 그 속에서 아득히 눈을 감습니다

잠의 치어들이 닫힌 눈꺼풀을 톡톡 건드릴 수 있게,

간혹 이불 밖으로 발을 차는 것은

잠 속에서도 당신이 줄기차게 헤엄을 친다는 증거


그 속에서 당신은

늙어가는 허파 대신

옆구리에 푸른 아가미가 패입니다

따뜻한 돌멩이들이 손바닥을 데워주던 시절처럼


하지정맥류의 종아리를 절뚝이며

만년 알바생인 당신은 또 나섭니다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

24시 편의점으로

“반지하방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면 삐걱이는 침대위에 그것은 펼쳐져 있습니다 한번도 각을 만들어 본 적 없는 그것에겐 시큼한 물비린내가 납니다“


시인은 풍요로운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으로 연명하는 노동하는 한 인간의 극사실적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한국의 반지하방은 자본주의적 도시문명의 그림자이고, 절뚝거리며 내려간다는 것은 소외된 노동으로 상처받은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준다.


침수 피해로 물비린내가 나는 그 방은 곧 그가 비록 고층아파트의 고층에 사는 사람이라도 소유/소비의 욕망의 침투로 물들어버린,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겪는 시적/알레고리적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지하도 아닌 반지하에서 어정쩡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물비린내가 나는 양서류로 퇴락해 가는 것일까? 우리의 토대인 인격이란 층위의 층차가 사라지고 있다. 마치 각이 없는 침대처럼.

“호수와 뭍의 경계에서 신발을 벗는 자와도 같이 당신은 그 속으로 옷을 입은 채 뛰어듭니다. 어린 날 냇가에서처럼 “


세계화된 화폐 자본의 폭력은 초기 자본주의 사회 보다 더 육체노동을 기계적/절름발이 노동으로 소외시킨다. 일그러진 기계적 기관이 된 비정규직 육체 노동자는 차라리 몽환적 미분의 세계로 뛰어든다.

시인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잔혹한 경제적 현실을 몽환적 이미지의 추억으로 환원시킨다. 추억의 기호들은 강제적이고 위계적인 내러티브를 벗어나 흐르는 냇가에서 떼로 헤엄치는 작은 치어들의 자유를 꿈꾸게 한다.

“당신은 그 속에서 아득히 눈을 감습니다. 잠의 치어들이 닫힌 눈꺼풀을 톡톡 건드릴 수 있게, 간혹 이불 밖으로 발을 차는 것은 잠 속에서도 당신이 줄기차게 헤엄을 친다는 증거“


수면은 의식의 깊고 얕은 흐름으로 침잠해 가는 현상이다. 잠 속에 가끔 나타나는 꿈의 이미지들을 시인은 잠의 치어라는 탁월한 은유로 표현한다. 기계적 노동이 잠시 멈춘 몸은 타타나노스(죽음의 욕망)로 가지 않고 다시 생의 본능을 일깨운다.


소외된 노동자는 창조적 생의 욕망때문에 꿈 속에서라도 어린 치어로  부화되어 다시 자유롭게 헤엄치기를 의욕한다. 그러나 이 가난한 노동자에겐 더 이상 예전 노동자들이 꿈꾸었던 혁명의 희망도, 거대 노조에 가입할 자격도 없다. 그에게는 이제 계급에서 해방된 꿈이 아니라 지친 몸에 필요한 숙면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당신은 늙어가는 허파 대신 옆구리에 푸른 아가미가 패입니다. 따뜻한 돌멩이들이 손바닥을 데워주던 시절처럼“


그는 모든 계급이 분화되기 전에 더 근원적인 태고의 상태로 회귀하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에겐 중세와 근대 사이 삼원적(사제, 귀족, 평민) 이데올로기(피게티)를 벗어나는 것 보다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마치 따뜻한 돌맹이들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손바닥을 데워주던 시절, 그 소중한 과거로.


하지만 강남과 강북, 수도권과 지방의 일자리와 부동산 그리고 사교육으로 인한 불평등의 격차는 더 이상 다수의 국민을 인간적인 노동이 아니라 더욱더소외된, 차별화된 노동으로 몰고만 가고 았다.


누군가 시인을 초기 잠수함에 태운 카나리아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산소가 부족하면 이내 죽어버리는. 이런 인간 차별과 안격 상실의 시대에 가장 먼저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시인이다. 허파 옆구라에 아가미가 패이듯한 통증을…

“하지정맥류의 종아리를 절뚝이며 만년 알바생인 당신은 또 나섭니다. 지느러미 돋은 달과 함께 24시 편의점으로“


카프카는 ‘변신’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기이한 현대인을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모두의 눈앞에 흔히 보이는 만년 알바생을 외면하고 있다. 좌파나 우파의 근본적 처방 없는 포퓰리즘과 기회균등이사라져 가는 냉막한 현실 그리고 아를 외면하는 지식인들.


시인은 냉정하게 그리고 어떤 노동 운동가나 인권 변호사보더 더 적나라하게 우리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달에 돋아난 지느러미가 보이지 않느냐고?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한다. 그 노동이 어떤 종류의 노동이건 간에 노동의 가치는 신성하다.


노동은 전생의 업보도 아니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몫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을 하는 한 그 노동은 놀이가 되고, 등산이 되고, 여행이 된다. 그러나 병든 몸을 이끌고 24시간 편의점에서 살기 위해 하는 일은 적어도 인간적인 노동,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는 고도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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