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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Oct 31. 2023

시와 철학 9

호모 링구아: 언어적 인간

겨울 저녁

               —게오르그 트라클(Georg Trakl)


눈이 창문에 떨어지면

저녁 벨이 길게 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그 집은 잘 정돈되어 있다.


집 떠난 나그네들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문으로 오세요.

대지의 차가운 육즙을 마시며

황금 꽃이 피는 은혜의 나무


길손들은 조용히 입장한다;

고통이 문턱을 굳혔다.

순수한 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식탁 위에 빵과 포도주가 있다.

“눈이 창문에 떨어지면 저녁 벨이 길게 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그 집은 잘 정돈되어 있다. “


아인슈타인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라 부른 게오르그 트라글은 하이데거가 ‘특별히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예를 든 시인들 중 한 명이다.


본래적 인간은 이 세상에서 시인 즉 존재의 언어가 도래하는 것을 표현하는 자로 산다. 존재는 객관화되기 이전의 근원적 자연(phsis)이다. 이 자연은 우리에게 특별한 언어 즉 시로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언어가 말하는 것을 그냥 말하게 하는 것이 시인이다.


자연이 겨울로 말하면 시인은 겨울을 가장 겨울스럽게 우리에게 언어로 도래하게 한다. 겨울은 계절의 저녁이다. 그러므로 겨울 저녁은 존재가 시숙(時熟), 즉 존재의 때가 무르익음이다. 겨울은 나그네에게는 집이 필요하고, 존재의 언어를 상실한 자에게는 존재의 집인 본질적인 시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 풍성한 식탁(존재 의미로 풍성한)에로의 초대가 필요하다.


“집 떠난 나그네들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문으로 오세요. 대지의 차가운 육즙을 마시며 황금 꽃이 피는 은혜의 나무“


존재의 근원을 찾아 방랑하던 나그네에게 겨울은 고난과 결핍의 계절이고, 과거의 신(神)이 부재(不在)하는 이 세대는 존재적 가난의 시대이기도 하다. 나그네들이 찾는 것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그들 존재의 근원인 대지 내에 흐르는 차가운 (구원을 기다리는 자에게 냉정하고 무심해 보이는) 기운을 받아 은혜 즉 인위적인 모든 것이 배제된 값없는 증여로 자라난 황금(영구적인 실재) 꽃이 피어난 나무를 보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뭇가지를 보나이다” 예레미야‬ ‭1‬:‭11‬ ‭

“길손들은 조용히 입장한다; 고통이 문턱을 굳혔다.

순수한 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식탁 위에 빵과 포도주가 있다. “


나그네의 발길이 문턱을 넘을 때마다 그것은 단단하게 굳어져 마치 화석처럼 견고한 흔적을 만들었다. 현대인의 이마에 새겨진 방황의 주름은 새로운 순수의 시대를 갈망한다.


순수가 사라진 시대에 나그네를 초대한 새로운 집들 안에는 황금 꽃이 피는 은혜의 나무에서 순수한 빛이 가득하다. 가난한 자는 순수한 갈망을, 부자는 게걸스러운 탐욕을 지닌 시대이다.


고향을 상실한 이 시대에 근원을 사유한다는 감사한 일이다. (Denken ist Danken: Heidegger) 즉 참된 사유는 감사의 사유다. 노자의 말에 따르면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즉 ‘배움은 채우는 것이고 도는 비우는 것이다’.


겨울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자연이 베푼 선물을 풍성히 식탁 위에 올리는 축복의 계절이다. 황혼은 황홀하다. 우리 인생의 황혼, 겨울의 저녁은 비로소 황금시기(golden ages)이고, 황금연못(golden pond)이다.


27세에 약물중독으로 요절한 이 시인은 어떻게 항혼의 비밀을 미리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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