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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l 21. 2022

시와 철학 6

잉여 쾌락의 고통: 바다의 미풍

바다의 미풍


-스테판 말라르메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
새들 도취하여 있음을 내 느끼겠구나!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오 밤이여! 백색이 지키는 빈 종이 위
내 등잔의 황량한 불빛도,
제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한 권태 있어, 잔인한 희망에 시달리고도,
손수건들의 마지막 이별을 아직 믿는구나!
그리고, 필경, 돛대들은, 폭풍우를 불러들이니,
바람이 난파에 넘어뜨리는 그런 돛대들인가
정적을 잃고, 돛대도 없이, 돛대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저 수부들의 노래를 들어라!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구나.’


욕망은 충족을 통하여 쾌락을 느낀다. 성욕은 성을 통해, 지식욕은 책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 정신은 육체의 연장이다. 두 신경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 이차적 충족이라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존재에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갈망의 고통 즉 주이상스가 남아있다.(라깡) 시인은 이 주이상스를 슬픔으로 표현한다.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 새들 도취하여 있음을 내 느끼겠구나!’


시인은 결코 충족되지 않을 갈망 안으로, 그 여백 안에 머물면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갈등을 허공을 나는 새의 이미지로 형성된 예술가의 창조적 환상으로 매우고자 한다. (프로이트)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보이는 것은 사실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감각 데이터가 뇌에서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일으키는 생화학적 현상의 결과이다. 그것은 마치 폭풍 속의 번개처럼 비치는 섬광이다. 마음의 섬광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뇌과학)

‘오 밤이여! 백색이 지키는 빈 종이 위 내 등잔의 황량한 불빛도,제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시인의 환상은 마치 꿈처럼 밤에 돌발한다. 그래서 빈 종이와 등잔의 황량한 불빛이 필요하다. 몽상의 시학(바슐라르)이 종이의 여백 속에서 주이상스를 언어적 상징으로 대체한다.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상징계의 과도한 억압을 떠나 시인은 다시 실재계로의 침투를 시도한다. 대상 a는 그의 주이상스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새로운 쾌락에의 충동으로 밀어붙인다. (라깡)

‘한 권태 있어, 잔인한 희망에 시달리고도, 손수건들의 마지막 이별을 아직 믿는구나! 그리고, 필경, 돛대들은, 폭풍우를 불러들이니,’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환상적인 창조로 대체하였지만 여전히 잉여 쾌락은 그를 다시 권태와 잔인한 희망의 영겁회귀(니체) 속으로 밀어붙인다. 잉여 주이상스의 폭풍우가 시작된다.

‘바람이 난파에 넘어뜨리는 그런 돛대들인가 정적을 잃고, 돛대도 없이, 돛대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저 수부들의 노래를 들어라!’


다시 상상과 상징과 실재가 만나지 못하는 여백의 공간 속에 들어선 시인은 오직 돛대라는 지향점도 없이 그렇다고 환상이라는 대체적 만족의 풍요도 없이 단지 의식 너머에서 들려오는 무의식이라는 수부의 노래에만 의지한다.

그 노래는 바로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그 노래이다. 이것이 바로 말라르메가 찾던 근원적 여백과 결핍에서 울려 퍼지는 참된 채움과 만족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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