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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Feb 06. 2023

시와 철학 8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바닷가에서


-타고르(Tagore, Rabindranath)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 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들려 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희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인간의 류적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 즉 생각, 의식, 사유가 현 인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호모 사피엔스종에서 일어난 인지혁명이 문명을 만들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파버(Homo Paber), 도구적 인간으로 진보하면서 고대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자 곧 잉여노동으로 인해 계급이 발생하고 다수는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유희면서 동시에 삶이 었던 노동이 고난과 노역으로 젼하는 순간 피지배자가 된 수메르인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낙원 즉 놀이동산이었던 에덴(기쁨)이라는 고향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인도 벵갈족 시인 타고르 역시 근대적 노동을 거슬러 삶의 본질이 유희 즉 놀이었던 순간을 회고한다. 마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인생aion은 장기를 두면서 노는 아이, 왕국basilēiē은 아이의 것이니.-헤라클레이토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 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아이들의 세계는 차이가 없다. 그들에게는 신분도, 권력도, 학력도, 소유의 차이도 없다. 그들의 놀이에는 확일성도 없다. 각자성(Jemeinigkeit)이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하이데거)


헤르만 헤세는 가장 난해한 저서 ’유리알 유희‘에서 25세기 후반에 이루어질 ‘카스탈리엔‘이란 이상사회 안에서 신인류의 삶이 다시 유희라는 원초적 놀이로 승화되는 미래를 꿈꾸었다.


마치 미래의 메타버스 시대에서 모든 종류의 학습과 노동이 놀이와 게임으로 대체되는 것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아마 밀레니엄 제로 이후의 세대들은 유리알 유희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삶의 양식을 굳이 구분하자면 소유의 방식과 존재의 방식이다. (가브리엘 마르셀, 에리히 프롬) 아이들의 삶은 존재의 방식에 가깝다. 그들에게는 획득도, 축적도, 지배도 관심이 없다.


비틀스가 ‘Let it be’에서 ‘지혜로운 말을 하라, 그대로 두라‘라고 외쳤듯이, 타고르 역시 그들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을 소유의 세계로 끌어들이지 말라!


차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윌리엄 워즈워드) 바르게 늙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소유 방식의 삶을 지양하고 존재 방식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들려 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희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브라만족 출신인 타고르에게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사상은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Brahman)과 개체적 자아인 아뜨만(Ātman)이 동일하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의 배후에 혹은 그들 안에 내재해 있다고 믿어졌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현상계의 차별적인 모습들은 브라흐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의 파도 혹은 물거품으로 설명되기도 하였다.


파도와 바다의 동일성이란 기반 위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은 모든 철인이 추구하은 범아일여 혹은 주객합일의 경지와 같다.


산다는 것는 것은 논다는 것이다. 논다는 것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논다는 것은 존재의 부름에, 생명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고 옛 선인들이 즐겨 이야기하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용기를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


아이들은 죽음을 당겨서 고민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재미있게 놀까?’라고 생각한다. 호모 루덴스의 특권이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또 어떻게 일을 하며 견딜지, 결국 죽을 인생, 왜 이렇게 바락바락 살아야하나?’라고 고민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존재의 방식에서 소유의 방식으로 이탈하렸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


결론은 소유의 판에서 존재의 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호노 루덴스는 진정한 호모 노마드(유목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에서 여행하는 자이다. 여행인의 옷차림은 간편한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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