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규 Nov 07. 2023

시작과 끝에 관한 사색 11

무에 관하여 3

우리 인류가 인간 정신의 분야에서 비범한 성취를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우주의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을 개발해 냈다. 아름답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미술과 음악, 문학 작품을 탄생시켰으며, 법률과 사회 규범의 체계도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신의 바깥에서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가치를 잃는다. 그리 고 우리의 정신은 원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그 원자들은 분해되고 해체될 운명을 가졌다. 우리 각자에게 그것은 모든 의식과 사고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는 늘 무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신을 일깨우는 생각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우리가 스스로 쌓아 올린 이 한시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사회로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만 할까? 내 개인적인 무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이러한 질문들에 관해 꽤 자주 고민했으며 내 삶을 이끌어 가기 위한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을 위해 이 심오한 질문들을 고민해 보아야만 한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나는 우리가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가 원했던 모든 문화와 법률을 만들어낸 엄청난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믿는다. 거기에 외부의 권력은 없었다. 외적인 한계도 없었다. 한계가 있다면 오직 우리 상상력의 한계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폭넓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69-70 쪽)

우리가 어떤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형성했든 간에 물리화학적 현실은 개인/인류를 넘어서 행성과 태양계를 포함한 별들의 소멸로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형이상학적 가설이나 종교적 신념도 이 냉엄한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가설이나 신념이 다소 현세에 위안을 준다 해도 현세의 이 삶을 대체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특권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적어도 나는 나와 타인의 고통을 가급적 피하거나 줄이며, 기쁨을 늘이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철학자 지젝이 내세운 슬로건처럼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바빠도, 아니면 물욕과 주이상스(잉여쾌락)에 중독되어 시지프스의 신화를 반복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추라 생각하라 ‘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개개인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할 수 있는 그때가 오기 전까진, 우리는 물리적인 육체와 두뇌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 정신상태에 갇혀 있으며 거기 에는 개인적인 기쁨과 고통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의심 없이 각자만의 기쁨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느낀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쁨과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기쁨이나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지적인 기쁨과 예술적인 고통, 도덕적인 기쁨과 철학적인 고통 등 모든 의미의 기쁨과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현실이며, 우리 내면의 현실이다.


그래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내 기쁨을 최대화하고 내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따분한 생활을 피하고, 엉망으로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고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사는 방법이다. 나보다 훨씬 더 생각이 깊은, 가장 대표적으로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과 같은 수많은 사상가도 매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색한 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알고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 시간의 웅장한 흐름 속의 바로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공의 일부가 아니다. 비록 언젠가 나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흙과 공기 속에서 흩어져 버리고, 나란 존재는 결국 사라져 버릴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이 순간을 느끼고 있다.


책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 손이 보인다. 창문을 가로지른 태양 빛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니, 바다로 향하는 솔잎 가득한 오솔길이 보인다.(70-72 쪽)

지금 내가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은 가장 직접적이고가장 구체적인 현실이며, 사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즉시 우리는 몽상이나 정신착란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생존의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없다.

산속이 아니라도 여행을 떠나지 않더라도 나는 순간순간 실존적 선택을 할 수 있고, 의미를 찾거나 부여할 수 있다. 누구나 창가에 자라는 민들레 홀씨의 싹에서 경이를 발견할 수 있고, 쓸데없는 소유와 능력의 경쟁에서 한걸음 물러나 참된 자아를 응시할 수도 있다.


소외된 노동 속에서도, 억압된 질서 속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안에서도, 심지어 형장에 끌려가는 길목에서도 우리는 ‘영원한 현재’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사유하고, 노동하고, 연대하고, 투쟁하고, 희생하고, 시룰 쓰고, 그림을 그리고 함께 노래를 부른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 “-윌리엄 블레이크

작가의 이전글 시작과 끝에 관한 사색 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