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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Apr 07. 2024

다시 읽는 에피쿠로스의 쾌락론 6

신화(영혼의 혼탁)에서 자연학(소란 없는 삶)으로

통상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의 발생을 신화(mythos)에 대한 이성(logos)의 전환으로 이야기한다. 특별히 유물론적 자연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변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무신론적(반신화론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태양을 아폴론 신이 이끄는 수레가 아니라 뜨겁게 빛나는 돌로 보았고, 심지어 생명의 기원이 올림푸스의 신들이 아니라 바다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았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인간 마음에 내재한 신을 인정하였다.


데모크리토스 이상으로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급진적으로 반신화적이었다. 그들은 마치 근대의 계몽주의자 혹은 실증주의자처럼, 여전히 신화의 유산에 바탕을 둔 고중세적 세계관에 적대적이었다.


신화는 현대에서 다시 그 이야기에 내재한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종의 미신에 빠진 것과 다름없이 영혼이 혼탁해진다. 신화적 믿음 안에서 인간의 평정심은 불가능하다. 신화와 실재를 구분하는 눈을 가지는 일은 만화나 판타지물에 빠진 아이가 과학이나 철학책을 읽는 청년이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소란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삶에 비이성적인 것과 근거 없는 생각을 비워내야 한다.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 각각을 현상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개연성 있는 이론을 사용해 설명하고, 우리가 그 설명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소란은 잠잠해진다.


하지만 현상들과 일치하는 여러 이론 중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거부한다면, 자연학에 관한 탐구에서 완전히 이탈해 신화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피토클레스여, 너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 두라. 그렇게 해야만 많은 경우에 신화에서 벗어나, 여기서 말한 것과 비슷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1원리, 무한, 그 비슷한 것에 관한 연구, 또한 참과 거짓의 기준, 느낌, 이런 것에 탐구하는 목적을 집중하여 연구하라.


이런 것을 모두 철저하게 연구하면,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런 것을 철저하게 연구해 기억해두지 않은 사람은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제대로 고찰할 수도 없고,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것을 탐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다.-피토클레스에게 보낸 서신 중

자연은 관습과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관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규약과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리가 규약을 통해 이 야기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연적인 권리가 존재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발명과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명이란 다름 아니라 자연 자체에 대한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신화에는 대립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상쇄의 법칙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관습, 규약, 발명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산업으로부터 오지도 않는다. 인간의 불행은 이런 것들에 섞여 들어가 있는 신화로부터 오는 것이며, 마치 자신이 만드는 작품 속에 그 무엇을 도입하듯 인간이 자신의 사유 속에 도입하고 있는 거짓된 무한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인간 속에서 신화로 되돌아오는 것과 자연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구분하는 일, 그리고 자연 자체 속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일, 바로 이것이 자연주의의 실천적인 대상이며 사변적인 대상이다. 최초의 철학자는 자연주의자이다. 그는 신들에 관하여 논하지 않고 자연에 관하여 논한다. -들뢰즈,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 중에서

망치를 든 철학자 니이체의 후예인 들뢰즈는 신화에이어서 종교가 만든 신의 이미지마저 파괴하려한다. “운명이 그릇된 물리학에서 비롯된 신화인 것처럼, 그리고 존재, 일자, 전체가 신학에 물든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신화인 것처럼 활동적인 신들은 종교에서 비롯된 신화이다.”


신이 죽고 신을 만든 신화나 종교가 사라지면 과연 인간은 참된 평정심에 도달할 수 았을까? 본질적으로 다원주의인 무신론적 부디즘과 정초주의적 기초를 가진 유물론적 신학이 새로운 시대를 사는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보편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천개의 고원’에서 다양성을 바텅으로 한 새로운 사유방식, 리좀적 사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불치병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투신 자살을 택한 그의 결정은 평정심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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