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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Apr 23. 2024

다시 읽는 에피쿠로스의 쾌락론 7

죽음에 대해서 1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라. 모든좋고 나쁜 감각이 있는데, 죽음은 감각의 박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님을아는 바른 지식은 우리 삶에 무한한 시간을 더 해주는 방식이 아닌,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삶의 필멸성조차 즐길 수 있게 한다.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철저하게 아는 사람에게는 사는 것과 관련해서도 두려움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에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정작 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데도, 그런 죽음을 예상하고서 헛되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재앙 중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재앙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죽음은 우리에게 오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산 자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도 없고, 죽는 순간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진 우리란 사유하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미리 예측하고 두려워하며 그것에 메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왜 인간을 죽음을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일까? 진화 생물학자와 신경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 용량이 불의 사용과 요리로 인해 급격히 증가하면서, 시간의식과 자전적 기억, 자의식을 통해 미래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약 4만 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 호미닌은 다른 호미닌의 죽음을 600만 년 넘게 지켜봤다. 그들은 다른 호미닌의 죽음을 친숙하게 여겼다. 그러나 자전적 기억을 서서히 발전시키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 크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4만 년 전에 일어난 자신을 성찰하는 자아는 꿈의 경험을 토대로 내세의 스토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종교학자들은 매장의식이 시작된 것이 고대 종교의 시작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왜 인류의 조상들이 갑자기 시신을 매장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후에 더 나아가 시신 역시 미라로 만들어 방부처리해서  보존하는 풍습 역시 왕이나 귀족의 매장문화로 나타났다. 이제 인간의 사후 이론 중에 영혼불멸설과 영혼윤회설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어떤 때는 죽음을 가장 큰 재앙이라고 여겨 피하고자 하고, 어떤 때는 죽음을 삶의 재앙들 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서 붙잡고자 한다. 반면에 현자는 삶에서 도피하려고 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현자는 삶을 걸림돌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재앙으 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음식을 고를 때 오로지 양이 많은 것이 아니라, 더 맛있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고르듯, 현자는 가장 긴 시간을 누리려는 게 아니라,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리려고 한다.


젊은 사람에게는 잘 살라고 충고하고 늙은 사람에게는 잘 죽으라고 충고하는 자는 어리석다. 이것은 단지 사는 것이 기쁘고 바람직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곧 잘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충고하는 자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고, 일단 태어났다면 아주 신속하게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가 정말 그렇다고 믿고 그런 말을 하고 그의 신념이 그토록 확고하다면, 삶을 버릴 수 있는 길을 아느 것인가?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에피쿠로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주의자들의 내세 선호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죽는 것은 오히려 영혼의 해방이다’라고 논증하는 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들에게 육체는 소마 즉 영혼의 감옥이다.


이 사상은 후대 가톨릭 사상가들이 만든 세계관과 결합하여 영혼의 불멸과 사후 세계의 존재 그리고 육체에 대한 멸시와 영혼의 우위 그리고 새로운 육체로의 부활과 영생이라는 종교 교리를 생성시켰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그리고 현대 물리학과 진화 생물학의 많은 발견으로 이 사상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더 에피쿠로스적이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그의 격언은 일반화되고 있다. 들뢰즈 못지않게 현대 사상의 전환에 영향을 끼친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에피쿠로스의 사상이 재현되고 있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영원이 무한한 시간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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