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진화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풀려난 힘(?)은 1750년 이후 세계를 여러 번 새롭게 만들었다. 1820년 영국의 중부에서는 농업활동지역과 분리된 몇몇 소형화된 산업화된 도시들이 나타났다. 맨체스터와 버밍검 같은 밀접한 중심지들은 먼지 날리는 도로망과 좁다란 운하를 통해 번잡한 수도 런던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런던에는 여기저기에서 석탄과 원료를 가득 실은 바지선들이 비쩍 마른 말들이나 또는 맑스가 [자본]에서 기록한 것처럼 거의 아사상태의 여성들에 의해 힘겹게 운하를 따라 끌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국 장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선전과 둥관과 같은 이름의 작은 마을과 도시가 있다. 당시 이 마을들은 대체로 자급자족적 농업지였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당 간부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8년에 생겨난 도시화의 경관에는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 도입된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는 산업화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세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며 동시에 혼란스러운 결과들도 만들어내었다고 서술한다.
하비에 의하면 자본주의라는 대하소설은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사회이론의 대부분(특히 경제이론)은 전적으로 이러한 패러독스들에 관한 고찰에 의해 추상화(이론화)된다. 부정적인 측면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화를 중단시켰던 주기적이고 흔히 국지화된 경제위기들을 겪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간, 제국주의 간 세계전쟁들, 환경악화 문제, 다양한 생물 서식지의 소멸, 급증하는 빈곤의 악순환, 신식민주의, 공공의료의 심각한 딜레마, 극심한 소외와 사회적 배제, 불안과 폭력 그리고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대한 걱정들이 포함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 중 일부는 물질적 삶과 복지의 수준이 어느 때보다 높은 세상, 이동과 통신이 혁명적으로 변하고, 인간의 상호행동에 대한 물리적인 공간의 장벽이 줄어든 세상, 의료와 의학 발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긴 수명을 누리도록 하는 세상, 거대하고 확장된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스펙터클한 도시가 건설된 세상, 지식이 늘고 희망은 영원히 샘솟고, 모든 것(자기 복제에서 우주여행까지)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두 측면은 일종의 모순이다. 저자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모순된 세계라고 표현한다. 이 세계가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급속하게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화를 뒷받침 하는 원리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 이유는 이 모순된 세계가 다윈이 자연진화에서 발견한 것처럼 지배적인 진화원리에 따르기보다는 이런저런 집단적이고 때로 개인적인 인간욕망의 경쟁적 변덕에 따라 우리 인간이 이 역사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사지리가 자본축적에 관한 의문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자본축적은 인구증가와 더불어 1750년대 이후 인류진화의 역동성에서 핵심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우선 공간조직의 진화란 물음은 잠시 제쳐두고 시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전을 고찰한다. 그는 독자에게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상이하지만 서로 연관된 '활동영역'을 통해 회전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주요 활동영역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기술적, 조직적 형태의 생산에 관한 것이다. 이 영역의 변화는 자연적 관계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에도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자본축적에 영향을 받겠지만(거주지와 종의 파괴, 지구온난화, 공해를 유발하는 새로운 화학물질, 토양구조와 삼림 등), 자연은 자본축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지구행성에서 진화과정은 항상 독립적으로 발생한다. 이를테면 새로운 병원균(HIV/AIDS/COBID-19)의 등장은 자본주의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코로나(코비드-19) 팬데믹은 세계 경제성장률 급락 및 경기 침체,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인플레이션,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대응 및 금융 시장 변동성, 노동 시장 및 양극화 심화, 디지털 전환 가속화 및 언택트 경제 확산을 가져왔다.
이 '활동영역' 모두는 일단의 제도적 편제(이를테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계약) 및 행정구조(국가 및 다른 지방의 다국적 재편방식)에 뿌리를 둔다. 이 제도들은 위기의 조건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적응되도록 강제됨에 따라 그 자신의 입장에서 진화한다. 사회체계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의 구축뿐만 아니라 전문가에 대한 신뢰, 의사결정자의 입장에서 적절한 지식과 정보, 합리적인 사회 편제의 수용에 좌우된다. 문화적 규범과 신념체계는 강력하게 나타나지만, 사회적 관계-생산 및 소비 가능성-지배적 기술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을 '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화'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하비는 자본주의의 진화궤적 내에서 일곱 가지 특이한 '활동영역'을 제시한다. 기술과 조직형태, 사회적 관계, 제도적, 행정적 재편, 생산과 노동과정, 자연과의 관계, 일상생활과 종의 재생산, 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화가 그것이다. 이 영역들 간에서 이루어지는 영향의 복잡한 흐름은 모든 영역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과연 이런 흐름의 다양한 패턴들을 한 학자 혹은 연구팀들이 읽어낼 수 있을까? 저자는 실례를 들어서 이 영역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한 사회의 일반적 성격과 조건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은 2005년 가을 한국의 새로운 한 도시의 설계에 관한 아이디어를 심사하는 심사단의 공동의장이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행정복합도시(현재는 세종시)라고 불린 이 도시는 원래 서울과 부산의 중간쯤에 위치한 새로운 수도로 계획했지만, 국회의 반대로 정부의 많은 행정기능이 이전하게 될 위성도시로 축소됐다. 심사단의 임무는 최종 설계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것이었다. 하비가 보기엔 당시 한국 정부는 여태까지 한국과 다른 대부분 아시아에서 지배적이었던 틀에 박힌 도시화가 식상해 무언가 다른 것, 아마도 혁신적 도시화를 위한 새로운 세계적 모델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논의 중에 저자가 끼어들어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기준을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다음과 같다. 설계안이 자연과의 관계와 도시에 배치될 기술적 혼합을 어떻게 제안하고 있는가, 앞으로 창출될 생산과 고용의 형태 및 이와 관련된 사회적 관계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서로 다르게 배치될 주민들을 위한 일상생활의 질과 이에 뒤따른 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화, 이와 같이 새로운 생활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정치적 주체성(개인주의화 혹은 사회적 연대의 형태)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등이 그가 제시한 기준이었다. 심사단은 그의 이런 제안에 상당히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다수의 독자들은 사실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조차 선명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하비는 만약 그가 완전히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책임진다면, 고정되고 동결되고 완성된 영구적 구조보다는 미래를 향해 진화할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결론 부분으로 나아가자. 저자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하는 과거의 시도들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위에서 말한 일곱 가지 영역 모두에 걸쳐 정치적으로 관여하여, 이 영역들 간 변증법이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열어나가도록 유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소련 같은 유형의 공산주의, 특정하자면 1920년대 혁명적 실험기 이후의 소련은 스탈린에 의해 종결되었는데, 그는 영역들 간 관계의 변증법을 생산력(기술)이 변화에 선봉에 서는 단선적 프로그램으로 축소시켰다. 이런 접근은 불가피하게 실패했다. 스탈린주의는 소련의 정체와 행정적, 제도적 편제의 침체를 초래했고, 일상생활을 단조롭게 했으며 새로운 사회관계나 정신적 개념화를 탐구할 가능성을 동결시켰다. 그 후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시장 개방과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소련이라는 연방은 와해되고 러시아로 축소되고 말았다.
마오쩌둥은 모순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하여 탁월한 변증법적 감각이 있었고, 최소한 원칙적으로 혁명은 영구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약진운동'은 생산과 기술, 조직의 변화를 강조했다. 저자가 보기에 이 운동은 당면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고 대규모 기아를 만들어내었지만 적어도 정신적 개념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혁명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와 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화를 근본적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변화의 시나리오는 모두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무리 저자가 지리학자로서 이론적으로 분석한 사례이지만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죽거나 참혹한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하여 공감하지 않고 이렇게 마오의 의도가 권력의 지속적 장악욕이 아니라 변증법적 감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설은 동아시아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석연하지 않다.
사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과거의 수많은 몽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세계(유토피아)를 위하여 다시 혁명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을 시작하려는 노학자의 이상이 몽상으로 그칠지 아니면 누군가 그의 정신적 개념화를 사회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연대나 그룹이 아직 존재하는지 그 자체가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이 너무 사변적이고 나아가 차라리 시적이다. "혁명은 이 단어 자체의 의미로 운동이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서로 다른 영역 내부에서, 그리고 이 영역들을 가로지르거나 이들을 통해서 운동할 수 없다면, 이는 결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모든 분야에서 혁명과 혁신이 일상화된 이 시대에 자신이 전공한 한 분야에서만이라도 실현가능한 대안을 내어 놓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확실히 변증법이란 이상한 논리는 '총체성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