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 읽기 1-10:의미의 지도 10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by 박종규

20세기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은 겉보기에도 그것들이 대체한 과거의 신념 체계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진정한 예술성과 창의성을 겸비한 창조물에 수반되기 마련인 신비하고 불가해한 요소도 결여되어 있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근본 명제는 합리성과 논리성, 명확성을 갖추었지만 끔찍이도 잘못된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세상은 거대한 이념 투쟁으로 갈가리 찢겨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는 쉽게 속아 넘어간다.


한 예로 서구에서 뉴에이지 운동은 전통적 영성이 쇠락하면서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나타난 것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작은 것에 연연하고 거대하고 터무니없는 문제는 묵인하고 넘어간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 이성적으로 납득되고, 더 나아가 경탄하고 믿을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까?


현대 인류가 지닌 막강한 힘 때문이라도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동기가 부여된 셈이다. 게다가 시기도 좋다.


세기말 무렵 공산주의 체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새천년이 다가왔다. 우리는 니체의 예언대로 자행된 20세기의 거대한 국가 통제주의 실험의 여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신조에는 '생을 부정하려는 의지'가 어설프게 숨겨져 있다. 사회주의 신조를 생각해 낸 인간과 종족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나는 몇몇 대규모 실험을 통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이 생을 부정하며 그 뿌리를 잘라 낸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니체)” (54-55쪽)

독일에서 발생한 나치즘은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에서 파생한 용어로써 니체가 예견한 전형적인 전체주의의 하나이다. 위의 사진 인물 순서로 보면 스탈리니즘, 나치즘, 마오이즘, 파시즘, 주체사상 등이 현대의 대표적 전체주의 사상이다.


이 전체주의는 사회주의 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근대의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는 이유와 유사하다.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는 개인 혹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필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본주의 생산제도의 핵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은 과잉공급을 불러오고 결과적으로 공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예언대로라면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한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여 시장경제를 유지하였으나 후진자본주의나 농업국가에서는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란 별종의 기형이 발생하였다.

한 예로 태동기부터 소멸기까지 소련식 공산주의를 특징짓던 관념적 순수이성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행동을 이끌어갈 가치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이 드러났다. 어떤 체계는 관념적으로는 이치에 맞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 작동하는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불가해한 체계보다 더 이치에 맞다고 해도 그렇다.


사회적 상호작용 양식은 사회적 행동의 본보기로 작용한다는 면에서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인데, 그중 어떤 것들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며,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 양식을 추종하며 실천하던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논리적이고 지적이며 계획적인 체계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비이성적이고 초월적이며 불가해하고 종종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인간적 특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묻겠다. 인간이란 그리도 이상한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거늘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지상의 모든 축복을 듬뿍 주고 행복의 바다에 흠뻑 잠기게 하여 오직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물거품만 표면에 샘솟게 해 보라.


잠이나 자고 당밀 과자를 먹거나 세계사의 존속을 궁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보라. 그리하더라도 그는 순전히 배은망덕과 악의만으로도 당신에게 비열한 속임수를 쓰려할 것이다.


심지어 당밀 과자를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그저 자신의 치명적이고 기상천외한 요소를 이 모든 긍정적인 양식에 밀어 넣고 싶어서 가장 치명적이며 효용성 없는 짓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바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계속 지니고 싶어 하던 환상적인 꿈이며 저속한 어리석음이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지 자연법칙이 일정표를 무시하고 아무것도 원하지 못할 정도로 막 두들겨 대는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입증해 보여야 하듯이 말이다.(도스토예프스키)“(56-57쪽)

자본주의는 인간을 화폐의 가치로 획일화한다. 반면에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혹은 공산국가는 인간을 이념의 가치로 획일화한다. 화폐 뒤에는 도구적 이성의 절대화가, 이념 뒤에는 목적적 이성의 절대화가 은폐되어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런 서구적 이성의 신화가 만들어내는 평균화, 획일화, 몰개성화의 위험을 지적한다. 피터슨은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선견적 통찰을 받아들이면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근거와 신념토대에서 행위의 규칙을 발견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다음 문장에 잘 집약되어 있다. “경험 과학의 정신과 종교의 정신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보편적인 도덕 체계를 확립하면, 개인의 내적 갈등은 물론 개인 간, 집단 간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58쪽)


과연 그럴까? 아직까지 피터슨의 주장은 온라인 매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전파되나 실제로 그가 제시한 행동의 규칙들은 사상이 아니러 자기개발의 영역에 주로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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